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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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년 내내 아빠의 출근길이 나의 등교길과 겹쳐 아빠 차를 타고 등교하곤 했다. 마치 차 기사를 둔 듯 편리하게 등교했지만 크게 혼난 다음날 아침에 차를 같이 타는 일이 굉장한 고역이었다. 아마도 그런 아침들 중 하나였을 건데, 무거운 공기 속에서 윤대녕 작가님의 은어낚시통신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적이 있었다.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무겁고도 신비스럽게 기억되는데, 소설의 내용 탓인지 그 사람의 목소리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다. 소설가인 아빠 덕분에 집에는 언제나 책이 그득했고, 집에 돌아와 은어낚시통신을 찾아 읽었다. 중학생인 내게 실존주의 소설이 이해될 리 없었지만, 그 느낌만은 강렬해서 윤대녕 작가님의 이름을 늘 기억하면서 살았다. 표지에 박힌 작가님의 사진도 내가 딱 상상했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11년 만에 윤대녕 작가님의 장편소설이 나왔다고 해서, 빨간책방을 챙겨 들었다. 김중혁 작가님과 이동진 평론가 님의 목소리는 한껏 상기되어있었고, 90년대 문학의 대가 앞에서인지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듣는 나도 그랬다. 윤대녕이라니,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빨간책방에 윤대녕이라니. 은어낚시통신이 어떤 내용인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딱 상상했던 목소리와 조금은 의외인 그러나 너무나도 어울리는 말투에 마음을 또 빼앗겨 버렸다. 고등학교 때 성당에서 어떤 누나를 몇주? 몇달?간 빤히 쳐다보다 그 누나가 "넌 왜 매일 나만 쳐다보니"라고 했는데 "당신이 나를 쳐다보는 이유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에, 아마 빨책을 듣는 모든 여성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한편으론 두근거려하지 않았을까.

​은어낚시통신을 어렵게 읽은 기억 때문인지 빨책을 듣다가 작가 님의 에세이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신작이 아닌 에세이를 구입했다. 세월호 사건과 장자연 사건 등 사회적 비극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작가 님의 말씀에 위로받는 한편,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고 무거우면 지탄받고, 모두가 예쁘고 좋은 것만 보려는 시대에 이렇게 시종일관 진지하신 작가님의 에세이가 필요했다.

이 책은 고향집, 목욕탕, 자동차 등 하나의 공간을 주제로 쓴 글을 모아둔 책이다. 작가님의 유년기부터 최근까지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며 그 공간을 떠남과 동시에 공간과 나의 흔적은 사라지지만 조금씩 자신의 안에 있던 꿈들이 되살아난다,는 주제이자 책 제목으로 책은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연재를 하면서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이 즐거웠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님은 에세이를 쓰는 동안 또 나아가셨구나, 더 멋있어지셨구나, 하고 느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기를 부정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볼 줄 알게 되기까지, 윤대녕이라는 사람이 형성하고, 사라진, 공간들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님이 이곳 저곳 혼자 잘 다니시는 게 무척 부러웠다. ​​충동적으로 제주도로, 전주로, 유럽으로 떠나고, 절에 몰래 들어가 앉아 담배를 피기도 하고, 광장 계단에 앉아 생각에 잠기고. 서울 아니 전국 구석구석 골목길을 걸어다니시는 작가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도 올해는 술을 혼자 먹으러 가봐야지! 라고 생각했다. 내 안의 그리고 남의 편견에 부딪치고 맞닥뜨리는 일이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일단 북앤펍부터 가보지뭐. 갑자기 신이 난다. 그곳에서 하나의 공간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는 거다. 이 책을 읽고 내 안의 꿈도, 좀더 자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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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4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름은 많이 들어본 소설가인데 ㅋ 아직 읽어 보지는 못 했어요. ㅎ 이제 시작하시는 것 같아요. 좋은 리뷰 기대하고 있을께여 ㅋ

근데 이미 쓰신 글이 앞으로 얼마나 좋은 글을 쓰실 지 기대가 되네요 ㅎ 아버지가 소설가라니 ㅋ 이거 책은 집에 많으시겠어요 ㅎ 아 부럽다.

반갑습니다. ㅎ 즐거운 금욜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