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시 기행 1 -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편 유럽 도시 기행 1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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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다고 해야할까

일단 이 분의 글 자체는 어렵지 않고, 오히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주는 능력이 있는 분이니 믿고 읽는다고나 할까.

그 와중에 유럽도시를 기행하고 책을 썼는데 파리도 포함되어 있어서 거의 출간과 동시에 샀다

그러나 읽는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글이 어려워서 오래걸린건 아니고, 자꾸 맥이 끊긴다고 해야하나..

그러니까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쓴 글인데

이 도시들에 대해 책으로 쓰면서까지 말하고 싶은 것이 역사인지, 정치사인지, 지금과 다른 과거인지, 과거와 다른 지금인지..잘 모르겠더라고. 이런 것들을 다 말하고 싶었으니 다 아우르는 책을 쓴거겠지만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처럼 사유가 중심이된 글이거나

태원준의 글들처럼 에피소드(어머니랑 다녔으니) 혹은 지역소개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췌문들은 겁나 많았지만..

생각보다 유서깊은 도시들에 대해 읽으려고 드니 내가 버거워서 산만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테네-

p.22

20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사피엔스는 7만년 전쯤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벗어났다는데, 우리의 조상들은 몇만 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유라시아대륙을 걸어서 횡단했거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의 후손인 한국인에게는 '역마살 유전자'가 있는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토록 미친 듯이 지구 표면의 모든 이름난 도시를 쏘다니겠는가.

p.32

그들은 폴리스의 영광과 번영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파르테논을 지었다. 그러나 이 신전은 사회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신의 권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와 능력'임을 다툴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증명해보였다.

p.36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는 믿는 자에게는 진리이고 믿지 않는자에게는 헛소리이며 권력자에게는 쓸모가 있다.

p.54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역사서를 집필했고, 극작가들은 빼어난 작품을 썼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은 아테네에서 피레우스까지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두려움의 건축적 표현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룬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았다. 오늘의 화려한 성공이 내일의 몰락을 가져올 비극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탈리아-

p.94

로마에 가서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착각이다. 이탈리아는 엄청난 다양성을 지닌 나라여서 어떤 도시도 혼자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지 못한다. 그렇구나, 나는 로마에 가보고 이태리 가봤어! 라고 말했는데...

p.98

왕국수립 이후 100년 동안 무려 2천5백만명의 이탈리아 국민이 나라를 떠났다. 처음에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과 남미, 호주 등 소위 '신대륙'으로 건너갔고, 신대륙의 이민규제가 심해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 독일, 스위스를 비롯한 인접 국가로 퍼져나갔다. 세계 어느 도시에나 피자와 파스타를 파는 식당이 있고 할리우드 영화에 이탈리아계 갱단이 흔히 출몰한 데는 그런 사정이 있다.

p.111

4세기 초 여러 공동 황제와 부황제의 대립과 다툼으로 정치적 혼돈에 빠져있던 로마를 힘으로 평정하고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했던 그는(콘스탄티누스 황제) 로마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였다.

그는 그냥 예수를 믿기만 한게 아니었다. 전임자들이 몰수했던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었고 지금의 가톨릭 교황에 해당하는 로마 주교에게 궁전을 기부했으며, 새 수도로 정한 콘스탄티노플 황궁 바로 앞에 '하기아 소피아'라는 소박한 교회도 지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수많은 소수 종교 가운데 하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종교도 어쩔 수 없이 정치의 은혜를 받아야 부흥한다.. 종교란 무얼까. 게다가 개신교란 무얼까.

p.118

귀족과 부자들이 토지를 독점한 가운데 제대군인과 빈민층이 늘어나자 원로원과 민회는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민회는 토지독점을 완화하는 개혁과 식량배급의 확충, 부채 탕감 조처, 제대군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귀족들은 사유재산불가침이라는 원칙을 내세워 모든 요구를 거부했다. 평민회의 호민관으로서 토지개혁을 추진했던 그라쿠스 형제가 살해당하는 등 갈등은 정점을 향해 치달았지만, 기득권 집단인 원로원이 개혁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기존 공화정 체제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제정으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심리적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있는것들이 더하고, 심하고, 너무하고..그렇다. 우리나라만 그런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이들이 그렇고 특히 옛날부터 그랬다니 위로가 되기도 하면서 인간이란 그때부터 지금까지 윤리도덕적인 부분에서 1도 발전이 없었나 싶어 씁쓸하다. 나도 당시의 귀족이거나 부자였다면 당연히 사유재산불가침을 내세웠을 것이고, 지금도 내가 교수나 고위공직자의 자리에 있다면 내 새끼들 군대빼고 명문대 보내는 것에 모든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p.121

그(카이사르)는 귀적이었지만 평민파에 가담했다. 어떤 술수도 마다하지 않고 권력 투쟁을 벌였지만 이긴 후에는 정적을 너그럽게 포용했다. 카이사르가 강남좌파인가 싶더라ㅋㅋ

-이스탄불-

p.170

역사라 무려 2천700년이나 되는 이스탄불의 최초 이름은 비잔티움(Byzantium)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영어로는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다음 500년은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었다.

오랜 세월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이 도시는 20세기에 터키공화국의 영토가 된 후 국제도시의 면모를 거의 다 잃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역사와 문화는 실종되었고, 그때 만든 몇몇 건축물만 박제당한 공룡처럼 덩그러니 남아있다.

p.175

도시의 성격은 더 크게 바뀌었다. 예전의 이스탄불이 지녔던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다양성은 거의 다 사라졌다. 터키공화국이라는 그릇은 1천5백년 이어진 국제도시 이스탄불의 문화 자산을 담아낼 만큼 크지 않았던 듯하다. 이스탄불의 흠을 잡으려고 하는게 아니다. 이 도시의 오래된 건축물과 공간을 독해하려면 이런 변화를 고려해야 하기에 하는 말이다.

p.184

이스탄불에는 오스만제국 500년동안 지은 자미만 3천개가 넘는다.......대한민국은 기독교가 들어온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수도 서울에만 교회가 5천 개나 된다. 가톨릭 성당과 불교 사찰, 다른 종교시설가지 합하면 이스탄불 자미정도는 가볍게 뛰어넘는다.

p.205

구시가의 시르케지 트램역 옆에 있는 기차역도 오스만제국 근대화의 흔적이다. 1883년 10월 4일, 파리에서 출발한 첫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오스만 양식과 유럽스타일이 결합한 시르케지 기차 역사는 두대륙을 품고 있는 이스탄불의 지정학적 강점을 보여준다.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없어졌고 통근열차와 단거리 노선 기차만 들어오는 이 역은 사라진 제국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기에 좋은, 달콤하지만 쓸쓸한 공간이었다.

p.207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영국에 넘겨주고 모로코, 튀지니, 시리아와 터키 남동부 지역을 프랑스에 내주었으며, 에게해의 섬 대부분과 에게해 연안 도시들을 그리스에 빼앗겼다. 수도 이스탄불마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연합군이 장악했다. 1922년 12월 마지막 술탄이 제국의 해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스탄불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을 때 오스만제국은 공식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 제국의 폐허 위에 아타튀르크가 터키공화국을 세웠다.

p.212

......아타튀르크는 터키를 '터키화'했다. .........19세기 유럽의 어떤 지식인이 100년 후 '세계의 수도'가 되리라고 예언했던 이스탄불은 변방의 가난하고 슬픈 도시로 변해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 누군가는 아타튀르크일 수밖에 없다.

p.234

"sokakta hayat var(길 위에 삶이 있다)

이스탄불에 대한 얘기들은 대부분 슬펐다. 그 도시를 관통하는 단어가 "비애"라는 오르한 파묵의 말이 더더 와닿았고, 저자도 중간중간 오르한 파묵을 언급하니 더 슬펐다. 슬프다. 한 20년 전에도 개신교인구는 3천명이었는데 지금도 3천명이란다. 그렇다고..

-파리-

p.246

프랑스공화국의 수도인 파리는 앞에서 만났던 세 도시와 달리 역사의 공간과 시민의 생활공간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으며, 오래된 건축물도 모두 살아 숨을 쉰다. 베르사유 궁전을 제외하면, 시민들의 일상과 떨어져 관광객의 볼거리로만 쓰이는 공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p.240

파리의 면적은 서울특별시의 1/6정도이고 인구는 2019년기준 214만명..

p.256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 프랑스의 수도 파리, 센강의 생 미셸 다리에서 시들어버린 꽃묶음을 보며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의 집합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이 아닐까? 완성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려고 도전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때로는 망가지고 부서져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는 이해관계와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다투며 공존하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포기하지 못하는 제도와 규칙과 관행, 민주주의란 그런게 아닐가.

생미셸 다리의 꽃묶음은 프랑스 민주주의도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고 말하는듯했다.

p.261

대혁명 이전 정치권력의 민낯은 루브르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더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대혁명 이후 프랑스 예술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여유있게 즐길 수 있었다.

p.266

튈르리 정원이 끝나는 지점에 콩코르드 광장이 펼쳐졌다. 대혁명이 터진 후 이 광장에는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철거되고 단두대가 들어왔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단두대에 열 달 간격으로 목이 잘렸다. 그런 광장의 이름을 콩코르드(Concorde, 화합 또는 일치)라고 지었으니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p.278

무엇보다 도로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땅을 징발하고 방해가 되는 주택을 철거하면서 토지보상금이나 이주 지원금을 주지 않았다. 외곽의 성벽 자리를 따라 큰 길을 만들었고, 도심에도 남북과 동서 방향으로 축을 이루는 대로를 여럿 신설했으며....

p.305

로댕미술관.....에는 창작무용을 예술로 끌어올린 '현대무용의 창시자' 이사도라 덩컨이 산 적이 있다. 화가 앙리 마티스, 프라하에서 태어난 독일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작업실로 썼다.

이 책의 파리부분을 읽으면서도 그렇고 얼마전에 읽었던 『커플의 종말』도 그렇고 파리 혹은 유럽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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