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그리스 하면 파란색이 떠오른다.  

나는 이것은 '그리스 파랑'이라 부른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를 이루는 쪽빛은 사진으로 봐도 눈이 시리다.

그 푸른빛을 마주한 하얀 집들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그리스만의 풍광을 만든다.

 

이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를 꿈꾸게 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면 몸살은 더 심해진다.

거침없는 자유의 기운에서 짭조름하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이 느껴진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기란 어려울 정도다.

 

거기다가 크레타식 식사법의 주 메뉴인 포도주와 올리브, 문어 숙회는

그리스라는 나라의 매력을 더해준다.

 

이런 점을 기대하고 박경철의 기행을 읽는다면 크게 실망할지 모른다.

4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내용도 말랑말랑한 힐링 여행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행문이지만, 요즘 쏟아지는 여타 기행문과는 성격이 다르다.

박경철 자신도 프롤로그에서

'이 책에서 나는 문명과 역사를 다루되 여행기의 형식을 빌려

공간 이동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자 한다.

즉 시간에 따른 공간 이동이 아니라

공간에 따른 시간 이동을 하는 셈'이라고 밝힌다.

 

저자가 그리스에서 행한 체험

문명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입 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는 자신의 영웅,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함께 그리스 여행을 했다.

(박경철은 니코스의 무덤 앞에서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자신에게

현지인이 왜 절을 하냐 묻자, "그는 나의 영웅"이라고 대답했다.)

 

니코스의 저작에 나온 문구들에서 여행할 곳을 정하고,

여행 중에 생기는 다양한 의문에 대한 해답 역시

책 속에서 찾는 방식을 사용했다.

 

즉,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저작들은

박경철을 그리스로 데려온 관광 홍보 책자이자

현지 안내 가이드인 것이다.

 

니코스의 책이라면 앞서 말한 '그리스인 조르바'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용 문구를 보니 그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린 윌슨이 그를 두고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였고, 러시아어를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책에 나오는 명문들을 읽다 보니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스파르타에 대해 설명한 부분)

 

 

저자가 여행한 도시는 코린토스, 올림피아, 아르고스, 스파르타 네 곳이다.

낯선 듯 익숙한 이름들이다.

신화를 읽을 때, 서양 역사를 배울 때 심심치 않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이름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름이라는 뼈대만 남고 도시들이 품었던 문명은 사라진 느낌이다.

 

 

 

 

(올림피아 박물관의 백미인 헤르메스상)

 

 

 

 

(올림피아 박물관)

 

박경철은 굳이 뼈대만 남은 도시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부서진 돌, 방치되다시피한 유적들 속에서

먼 옛날의 영광을 재현한다.

 

동시에 남들이 많이 가 보지 않은 곳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마을 사람들과의 끈끈한 정을 확인하는 대화나 식사와 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종종 나온다.

(그런데 꽤나 깊이 있는 현지인과의 대화를 과연 영어로만 가능했을까?

아니면 그리스어를 배우고 간 것일까?)

 

 

 

 

 

 

문명의 배꼽, 그리스.

생명줄인 탯줄의 흔적이 바로 배꼽이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진화하면서 배꼽을 감추고 살았다.

배꼽을 보이는 옷차림도 이제는 흔한 패션이 됐지만,

그것은 성적 매력을 부각하려는 의미 말고 다른 것은 없다. 

예쁜 배꼽을 만드는 수술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리스 역시 멋진 복근을 드러낼 때 슬쩍 보이는 배꼽,

혹은 너무 뚱뚱해 뱃살에 묻혀 버린 배꼽 정도가 되어 버린 게 아닐까?

 

박경철은 이 책에서 배꼽을 신체 부위 그 자체를 응시한다.

독자들에게 탯줄이 잘린 흔적, 배꼽을 느린 호흡으로, 친절히 설명한다.

 

그래서 책을 막 읽기 시작할 때는 그리스에 대한 환상이 푹 꺼져 버린다.

쪽빛의 파란 그리스는 보이지 않고

뿌연 하늘색, 또는 회색빛만 가득하다. 

 

조금 지나면 나도 모르게 독서 속도가 빨라진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금세 다 읽어 버렸다.

저자의 사색 속도만 따라가면 나 역시 사색에 몰입하게 된다고나 할까?

 

 

 

 

 

다른 여행 가이드책처럼

읽는 즉시 심장이 콩닥거리면서 당장 가방을 꾸리기보다는,

명상을 하듯이 차분하게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

 

다소 낯설고 밋밋하면서 어려기도 한,

그러나 여행 중 흘린 땀, 정신적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이다.

 

 

책을 덮으니 '박경철 그리스 기행 1'이라는 표지 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1권이라...

에필로그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준다.

펠로폰네소스(3권)를 들여다 본 것을 시작으로,

아티카(4권)의 테살로니키(1권), 마그나 그리이키아(2권) 등이

남았다니 길고 긴 여정이 더욱 기다려진다.

 

아마 그리스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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