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죽음과 삶에 대한 해석
성서를 보이지 않으시고 또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이해는 상식이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을 보며, 의구심을 초래하는 세태가 요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그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죄책감에 자살을 선택한 일에 대하여 한 마디로 평가하셨다.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한 사람”
가룟 유다의 선택이 이 땅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그 삶의 의미와 방향에 대하여, 영혼과 육체를 지으신 창조주의 뜻과 완전히 빗나간 행위임을 표현한 것이다.
오히려 이 말씀은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죄책감이나 무능, 무기력하다고 자책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을 봐서라도-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주신- 생각과 행동을 달리했어야 할 일임을 유추할 수 있다.
현실의 고통을 스스로에게만 한정하고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 ‘하나님도 용서하시겠지’ 등의 자기를 측은하게 여기며, 우울한 자신과 상황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내 삶의 주체라고 여기고 있는가?
아직도 혼란스러운 자신을 신뢰하는가?
믿음의 대상에 따라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진다.
지금껏 자신의 경험, 감정, 지식, 판단을 믿고 살았다면 모든 것을 내려두고 겸허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시된 말씀대로 살아보라.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날 뿐 아니라, 본래 세상을 다스리라고 인간에게 주신 주도권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예를 다 버리시고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언급한 그 한 마디에 분명한 뜻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면 상식으로 알고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 끝이라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특별계시인 성서를 통해 알려주셨다.
이 땅에 괴로움을 안으면서까지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이유가 그 날 거기에 있지 않으면 소위 ‘예수쟁이’도 껍데기이거나 무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며, 영원을 상속받은 그리스도인은 보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쫓아 달려가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고통스러운 줄 몰랐던가?
신앙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나 유리하는 인간의 실존을 보라.
불가(佛家)에서 독창적으로 이해한 개념이나 주장이 아니다.
이미 죽어 희뿌옇게 스러지는 뼛가루와 같이 그 형체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들,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보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 땅 위에 살다 거쳐 간 사람들.
모두 살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운다는 사실을 믿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인류에게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