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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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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은, 김모미가 되지 못한 나스따시아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비극적 사건이나 이야기의 구성 자체보단 당대 세태를 보는 재미가 더 있었다.

<죄와 벌> 다음 출간한 장편으로, 근대 제정러시아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이 도시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 동시대 소설의 배경이 된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는 사회 전방위에서 근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등장인물들도 세속적 인물,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인물, 자유주의자 또는 니힐리스트의 범주 안에 있다.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인물들이 소설의 주된 화자다. 백치인 미쉬낀 공작과 팜므파탈 나스따시아는 각자 백치라서, 또는 복수를 꿈꾸는 여성으로서 유사한 방식으로 세태를 거부하고 각자 사랑과 연민, 복수에 매진한다. 미쉬낀의 ‘사랑과 연민‘은 전형적 풍속소설의 플롯을 벗어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 문장이 세련되기 때문에 지루하진 않지만, 여하튼 예상을 벗어나는 새로움은 없다. 주변 남성들의 도덕적 치부를 자백하게 하는 나스따시아의 복수는 자기파괴와 주변인 모두의 파국으로 이행되어 통쾌함보다는 안타까움만 남긴다. 더글로리 문동은 식의 ‘제 손에 피 안 묻힌 복수‘라든가, 마스크걸(웹툰) 김모미 식의 광란의 응징도 아니어서 복수 자체는 그 주체성의 부족 탓에 심심한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시대에서는 강렬한 인물이었을 테다.

주된 사건 이외에 군더더기가 많은 편이다.(매수당 원고료를 받았을 거 같다) 하지만 군더더기도 당시 세태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나름의 흥미가 있다. 작가 본인의 유배 생활에서 비롯된 경험담, 니힐리스트들을 풍자하는 일화, 간질 발작이 시작되는 과정(작가 본인이 간질에 오랫동안 시달렸다)에 대한 세세한 묘사 등이 전개되는데 특히 연적이자 친구인 로고진에게 살해 위협을 받기 직전에 묘사되는 간질 발작에 대한 묘사는 신기하기도 하지만 이후 이야기 전반에 긴장감을 걸어준다.

소재로 나오는 한스 홀바인의 미술작품 <죽은 그리스도>와 러시아 철도가 당대 뜨거운 이슈이기도 했던 사상과 관련한 지형을 드러낸다. 죽은 그리스도는 세속적 인물 로고진의 집에 걸린 복제품으로, 그리스도의 시신이 부활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부패한 상태로 그려졌다. 니힐리즘이자, 로고진을 설명하는 이미지다. 러시아 철도는 재미있어 논문도 찾아봤다. 영국보다 뒤처진 러시아 철도는 1830년대에 일각에서 건설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그 효용성이나 비용 문제로 학계나 왕정의 불신을 얻었다.(당시 처음 제안된 철도 모델은 50인 이하 탐승 시 말이 견인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제국주의 침략 정책을 추진하던 제정 러시아의 이해에 맞아지면서, 이후 국가가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작중 첫 장면이 빼쩨르부르크로 향하는 기관차 객실에서 미쉬낀과 로고진의 조우다. 이후 각 장의 서두에 철도 관련 언급이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부러 철도에 함의를 담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세속적 당대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소재다. 더불어, 파국으로 향하는 등장인물들의 불가피한 상황도 암시하는 듯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쉬낀의 입을 빌려 세속적 세태와 사상, 이 때문에 비극으로 치닫는 인물들이 구원을 얻을 길은 연민, 특히 미쉬낀이란 인물이 표상하는 그리스도적 연민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점은 사형 선고라는 작가 본인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한 착하고, 심심한 결론처럼 보인다. 그래서 차라리 나스따시아의 서사에 애착이 가는 나는 나스따시아가 예수처럼 살해당하지 말고 차라리 살해하는 범죄스릴러가 됐으면 더 명작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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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자네의 연민이 나의 사랑보다 강렬하다는 걸세˝
무언가 잔인하고, 당장이라도 표출시키고 싶어하는 어떤 것이 그의 얼굴에서 타올랐다.
˝자네의 사랑은 증오와 분간이 안 되네˝-331p
...
로고진은 자신을 비방하고 있다. 그에게는 괴로워하고 연민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이 있다. 그가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상처받은 그 반 미치광이 여인이 무척이나 가련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게 될 때, 그는 지금까지 그녀로 인해 고통받았던 모든 것을 용서해주지 않을까...연민은 로고진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와 교훈을 줄 것이다.-3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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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 베이징에서 마주친 젊은 저항자들
홍명교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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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허다션과 마르크스, 한국 활동가가 만난 진짜 중국
홍명교 저,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중국에 두 차례, 총 두 달 가까이 지내본 경험은 새롭고 값어치 있는 일이었다. 한국에 살면서 미디어를 통해 접한 중국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에게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기질이 있는데, 호탕하고 배포가 큰 모습. 감정이나 의견을 드러내는 걸 꺼리지 않는 모습은 반도 사람으로선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당연히 세풍에 삭아 약삭빠른 사람도 있었지만, 가는 곳곳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 무구한 호의를 받곤 했다.

중국인에 대한 호감을 가진 뒤, 중국과 연관된 보도나 이슈를 접하면 한층 더 고민하게 됐다. 중국과 관련한 이슈를 보도할 때 한국 주요 언론은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논조 차이를 보인다. 어느 한쪽은 중국 혐오를 바탕으로 보도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중국 혐오 정서를 활용해 정치 혹은 외교를 압박하는 당파적인 논조를 보였고, 어느 한 쪽은 그저 중국에 대해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듯했다. 중국 혐오는 한국의 당파적으로 양분된 언론 지형에 먹잇감으로 활용됐고, 그래서 미디어에서는 내가 접한 실제 중국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에 살아가기 때문에 실제 중국을 이해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당리당략적으로, 혹은 외교적 실리를 찾자는 차원에서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드로 인한 한중 갈등에서 누가 피해를 보고 누가 이득을 봤는지 살펴보면 명확하다. 사드 갈등이 이어지는 동안 군수 산업체는 매출 증가와 주가 상승으로 돈 잔치를 벌였고, 갈등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숱한 소상공인들과 지역 주민에게 넘겨졌다. 우리 삶과 연관된 문제를 정치나 언론이 제멋대로 좌우하는 배경에 중국 혐오가 있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일갈등 등에도 적용되는 문제며, 그래서 혐오를 걷어내고 문제를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진짜 중국의 모습을 보려면 중국에 가보는 것이 좋지만, 코로나로 여의치 않기 때문에 추천할만한 책이 있다. 홍명교 작가가 쓴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2021, 빨간소금 출판사)에는 진짜 중국의 모습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중국인들은 싼허다션(선전시 룽화구 싼허에 거주하는 중국 청년 노동자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말)부터 농민공, 권위주의 중국에 저항하는 중국 활동가까지 다양하다.

싼허다션은 현대 중국의 실체를 보여주는 이들이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아래, 강력하고 반인권적인 당정의 통치 아래 희망 없이 자조하는 이들로, 나도 배회하는 싼허다션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중국을 처음 방문했던 2011년 선전시를 잠깐 경유할 때였다. 내게 선전은 환락과 야근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베이징에서 기차로 이틀에 거쳐 남하하고 숙소 잡기 바빴지만, 길을 가며 만난 사람들은 퇴근길 노점상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청년을 많이 만났고 그들은 일을 마친 노동자이거나, 피로한 가운데 틈을 내 청춘을 소모하는 청년들이었다. 기차에서 말을 튼 자오민도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잠시 선전에 온 차였다.

그즈음, 선전 한 공장에서는 연속적인 죽음이 있었다는 걸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를 보고 알았다. 2010년 아이폰을 만드는 폭스콘 공장에서 몸을 던진 청년노동자 마샹첸(馬向前)을 시작으로 수십 명 이상이 이 공장에서 스스로 죽었다. 청년 노동자 쉬리즈(許立志)도 그들 중 하나다. 그는 2014년 9월 30일 폭스콘 공장에서 몸을 던졌다. 사방이 가로막힌듯한 절망 속에서 쉬리즈가 투신하기 전, 자신의 웨이보 계정에 시를 남겼다.

몇 해 전 그는/배낭 멘 채/이곳을 밟았다/이 번화한 도시를//의기양양하게//
몇 해 뒤 그는/자신의 유골을 움켜쥐었다/이 도시의/네거리에 서서//
(‘망연히 사방을 둘러보다‘ 中,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발췌)

폭스콘을 포함해, 선전 지역 노동 현장은 중국 청년 노동자에게 가혹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을 제공했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야 할 중국 노조(공회)는 단체행동권조차 없는 조직이며, 사실상 소위 ‘기업 공회‘로써 위기관리를 위한 조직에 불과했다. 2010년도에 불거진 연쇄 죽음 이후 세계적 관심이 모이자 폭스콘 공장을 운영하는 홍하이정밀공업은 약간의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하는 것으로 위기를 관리했다. 이는 인근 다른 공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되는 방식이었다.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중국 청년 노동자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 절정이 작가가 중국에 거주하던 2018년도에 벌어진 자스커지 투쟁이다.

자스커지 투쟁이 주목되는 점은, 투쟁의 주역이 중국의 80~90년대생(바링허우(80後), 지우링허우(90後))이란 점이다. 이들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좌절을 겪어보지 못한 중국의 신노동자로서, 대체로 ‘싼허다션‘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생을 옥죄는 중국 사회에서 저항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특히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를 내세우는 곳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자스커지 투쟁에는 선전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운동가들도 함께했는데, 그들은 마오주의자였고,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들은 노동자와 연대 활동을 할 때도 인민해방군 노래나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급진적으로 투쟁했는데, 공안은 그들을 잡아가 감금, 고문하며 강하게 탄압했다. 마오쩌둥이 세상에 없는 중국에서 마오주의자의 입이 틀어막힌다. 바로 그 외침이 중국 공산당의 역린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학생운동단체는 한 줌이며 그들의 외침은 사회에 전혀 타격감이 없는데(예를 들어 윤석열 지지 선언이라든가)이와 중공의 트라우마적 반응을 비교해보면 바로 중국 사회 변화의 시작이 노동운동-학생운동에 있다고 보이게 된다.

학생운동가, 노동운동가가 공안 탄압에 하나둘 사라져가는 걸 보며, 그들과 깊이 교류했던 작가는 펜을 들었다. 그 결과물이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이다. 이 책에는 자스커지 투쟁을 비롯해 중국 농민공 문제, 농촌 사회와 학생운동가의 모습이 역사적 배경과 함께 설명된다. 작가 또한 한국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매진했던 활동가이기 때문에, 작가가 회상하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황과 중국의 상황이 대비되는 부분에서는 한국의 현재와 한국 사회운동이 나아갈 길마저 볼 수 있다.

중국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는 「중국의 붉은 별」 이라든가 「아리랑」을 재밌게 읽었다면 이 책 또한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내용적으로도 중국 현대의, 바로 지금의 첨예하고 심각한 사회적 모순에 대해 직접 보고 겪은 바를 쓰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붉은 별」을 중국 근대 르포라고 한다면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는 그에 견주어 중국 현대 르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작가가 영화감독이기도 하기 때문에, 글도 잘 짜인 시나리오 보듯 막힘없다.

이 책의 백미는 ‘국제연대‘ 활동을 고민하고 제안하는 부분이다. 문제를 분석하기만 할 것이면 차라리 논문을 읽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노동운동의 깊은 경험이 있는 활동가만이 제시할 수 있는 대목이 있고, 그것이 바로 ‘국제연대‘다. 자본과 기업은 이미 충분히 국제적인데(대구의 경우 한국게이츠 대량해고, 흑자폐업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은 국가 안에, 기업 안에 갇혀 있다. 국가 또한 코시국에도 기업의 국제적 자유화를 위한 논의(CPTPP)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를 도모하는 것은 거의 유일한 대항 방법으로 보인다. 작가는 책에서 두 가지 구상을 하는데, 하나는 동아시아 다크투어 무크지 만들기,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국제연대센터 만들기이다. 작가가 현재 활동하는 단체인 플랫폼C(platformc.kr)이 그 구상의 한 과정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도 지금 동아시아 사회운동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도 있다. 나 또한 이주민과 그 문화에 관심이 있기에 계속 참고하려 한다.

결어: 미디어가 전하지 않는 진짜 중국 이야기를 보려면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를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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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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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휴일을 맞아 읽은 <소각의 여왕>. 리뷰는 아니고, 독서노트.

이야기 구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을 보다보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연쇄하는 플롯과 중심인물의 성장(혹은 파멸). 가령 어두운 세계관 속에서 중심인물에 시련이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고 할때, 그 세계관 자체의 정교함이나 참신함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독자를 기나긴 이야기에 붙잡아 두기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플롯이다.

플롯은 소설에서 세계관 만큼이나 중요한 기술이다. 세계관이 멋진 이야기라도 플롯이 엉성하면 인내심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소각의 여왕>은 폐기물 처리업을 하다가 헛된 희망에 몰두하는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러 유품정리사 일까지 도맡게 되는 딸의 파멸을 보여주는데, 그 중심 줄거리가 허파에 바람 들어서 폐기물에서 귀금속을 제련하는 기계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교차하고, 폐기물 처리 업계 주변 인물의 작은 에피소드와도 교차한다. 이야기들이 어느정도 연쇄하는 듯하지만, 도미노처럼 이전의 이야기가 다음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촉발하는 치밀함이 없다. 즉 플롯의 구성이 엉성하다. 고등어에 관심이 있는데 자꾸 오징어 꼴뚜기 이야기가 불쑥불쑥 나오는 듯이 느껴졌다. 오징어 꼴뚜기 이야기 비중이 크다면 주제도 오징어 꼴뚜기여야 한다.

독자 잡아 채기 외에도 플롯을 통해 해야하는 건 파국의 끝에 중심인물의 성장이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떤 인물에 닥친 시련의 나열 만으로는 그 인물이 실존인물이 아니고서야 의미도 감동도 남길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내게 <소각의 여왕>은 폐기물 처리나 유품 정리에 대한 르포적 관심이 없었다면 읽기 어려웠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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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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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일전에 독서노트에 파국보다는 연대를 담은 이야기가 끌린다고 썼다. 문학적 관심사가 그렇고, 요즘은 업무적 관심사도 마찬가진 거 같다.

파국적 주제. 점점 더 악화해서 결국 무너져버리는 형국과 관련한 이야기는 기사에서도 다룰 기회가 있었다. 예를 들어 폐기물 문제, 기후위기 문제, 이주민·이주노동과 관련한 문제 같은 것들이다. 이런 문제들의 특징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 혹은 윤리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지금 세계의 시스템의 잘못됨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이다. 악화를 거듭하다가 결국 와장창 무너지게 되리라는 암울한 예감을 주는 문제들이다.

이런 주제를 다루면서 파국을 넘어설 연대의 길은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이와 관련한 사상이 있으면 숟가락을 좀 얹어보고 싶었다. 그런 차에 추천받은 책이 바로 지젝 저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보건의료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적 차원의 문제로 진단하고 이 문제를 넘어서 살아가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책이다. 겁 없이 도전했다가 포기한 지젝의 다른 저서들 때문에 망설이긴 했는데, 쉽다고 해서 읽었다. 그런데 어려웠다. 두 번을 내리읽었는데도 몇몇 어려운 주제들이 있다.

미국 우파 포퓰리즘 비판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좌파 비판까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많지만, 비판이나 분석 외에 지젝이 주장하는 바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세계의 생산-특히 농업 생산은 이주 노동이 수행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 형태는 바이러스 확산이 쉬운 형태다. 이렇듯 계급마다 팬데믹의 의미는 다르다. 노동자가 스스로 생산수단을 휴대하는 시대에서 ‘자유‘를 외치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제하자는 주장은 ‘돈이냐 목숨이냐‘라는 잘못된 선택지를 강요하는 일이다. 경제 소생과 생명 구제 사이에서 무기력한 선택을 하지 않게 할 새로운 경제 질서가 필요하다. 팬데믹 위기의 해결책은 더 많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있지 않다. 팬데믹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시스템의 위기를 보여주는 일종의 ‘트라우마‘다. 위기의 증상으로 곳곳에서 폭력적 분출이 나오고 있다. 폭력이라는 산통 없이 권력의 민주적 이양은 없다. 이 긴장을 야기한 주체는 우파이고 그래서 좌파의 임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구하는 일이 됐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야 한다.

2. 펜데믹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철학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도 필요하다. 팬데믹이 단지 정신적 병리 증상을 유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신적 병리 증상은 존재론적 범주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국적 현상에 대한 정신분석학을 적용하는 대목은 흥미 있었으나, 이러한 분석이 스스로 얘기하는 ‘새로운 질서‘, ‘민주주의 넘어서기‘와 구체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 느낌이다.

우선 지젝은 팬데믹이 트라우마를 일깨워 주는 촉매라고 지적한다. 정신분석학에서 자아는 ‘욕망‘을 거세해서 꿈의 영역(무의식)에 두고, 일상에서는 거세된 자아(대타자)로 존재한다고 한다. 욕망을 마주하는 건 그래서 꿈의 영역에서다. 진짜 꿈을 꾼다는 말은 아니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현실에서 꿈을 꾸고(환상)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실재가 아닌 이데올로기적으로 재구성된 실재(이데올로기적 꿈)다. 이데올로기적 꿈은 현실의 실재(파국으로 치닫는)를 그대로 마주하지 않도록 기능하는데, 팬데믹이라는 현상은 꿈꾸는 자아의 트라우마로서 이런 실재를 마주하도록 강제한다. 이때 꿈꾸는 자아는 트라우마를 마주하지 않으려고(폐재) 꿈에서 깨 현실로 도망간다. 그 현실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인 꿈으로 구성된 현실이다.

지젝은 꿈꾸는 사람들의 예시로 우파 포퓰리스트와 자유주의적 좌파의 사례를 든다. 트럼프를 예로 들어, 그는 그의 외설성을 무기로 공적 영역에서 행정력을 제약 없이 행사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홍준표가 가끔 연상됐다.) 그래서 트럼프에게 ‘외설적이다, 비윤리적이다‘라는 비판은 실효성이 없다. 온갖 음모론, 애국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꿈을 조성해 이득을 얻는 트럼프를 비판하는 방법은, 트럼프가 외설적이지 않게 진지하게 말하는 ‘애국주의‘ 같은 것을 오히려 외설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자유주의적 좌파는 트럼프의 외설성에 매달린다. 트럼프에게 도덕적으로 분노하면서, 그리고 현실의 문제적 ‘트라우마‘는 언급하지 않고 회피하면서 트럼프의 파시즘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자본주의의 위기보다 트럼프의 파시즘을 문제 삼는 버니 샌더스나 심지어 네오콘의 지지마저 등에 업은 바이든은 트라우마를 회피하고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꿈을 조성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트라우마로 인해 분출되는 대중의 트라우마적 반응(폭력)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은 현재의 정치 공간에는 없다.

이제 지젝은 일상성이 해체되는 파국에서, 특히 이 파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팬데믹이라는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다시 이데올로기적 꿈을 꿀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새로운 일상성을 구성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여기서 지젝은 새로운 일상성에 대한 명확한 구상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젝이 피히테의 ‘상업적 무정부상태‘(정치가 경제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해 자본의 민원해결소처럼 되어버린 상태) 개념을 끌어와 자유주의적 자유가 초래한 ‘불평등‘, ‘식민주의‘ 등의 치명적 모순을 지적하는 점. 그리고 팬데믹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강한 봉쇄정책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돈이냐 목숨이냐‘라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시스템이 필요하고, 그 선상에 ‘공산주의‘를 언급하는 점. 이 두 가지 측면을 본인이 주장하는 ‘새로운 일상성‘의 실마리로 제시하고 있다.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누구나 ‘일상성‘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지젝은 기후 위기·이주 노동·플랫폼 노동의 위기(한국 경제 특성에 맞춰 자영업자의 위기를 포함하면 좋겠다) 등과 같은 파국과, 이에 대한 대안이 없는 기존 정치의 한계를 팬데믹이 일깨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돌아가야 할 그 일상이 이미 파국의 상태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꿈이 아니라, 새로운 일상이다.

‘뉴노멀‘이 클리셰처럼 빈말로 언급되는 이때, 지젝이 던지는 질문, ‘돌아가야 할 일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또 다른 석학이 빨리 답해주길 바라면서..개인적으로는 ‘국제주의‘, 또는 ‘이주 노동‘에 대해 공부를 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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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죄의 궤적 1~2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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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궤적‘-오쿠다 히데오

괴이한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미군이 패퇴하고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탈환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아무래도 지금의 시대정신이라는 게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통합이라는 통치자의 언어에 누구도 공감하지 않는 시대, 거대한 파국과 유약한 연대 사이에서 위태로운 시대랄까.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죄의 궤적‘은 패망 후 60년대 도쿄 올림픽을 앞둔 도쿄가 배경이기 때문에, 지금의 시대정신과는 사뭇 다른 시대의 분위기가 담겼다. 지금의 분위기와 대조되다 보니 새삼스러운 흥미는 있었지만, 왠지 작가의 아젠다가 좀 뒤처졌다랄까, 과거에 너무 머물러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야기는 범죄자의 사정과 내면을 추적하면서 범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구조다. 전형적 구조에서 이야기를 살리는 것은 세계관과 인물인데, ‘죄의 궤적‘은 세계관은 훌륭했으나 매력적인 중심인물은 없어서 아쉬운 이야기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양들의 테러리스트‘(오쿠다 히데오)에 나오는 ‘구니오‘와 같은 매력적인 인물이 없다. ‘죄의 궤적‘에 나오는 중심인물 ‘우노 간지‘는 가정폭력의 트라우마로 기억력이나 사고에 장애를 얻은 인물인데, 이 장애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는 장점이 되지만, 결국 중심인물이 ‘피해자‘라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는 제약이 되기도 한다. 모순 가득한 도쿄 올림픽을 뒤집어 엎어버리려고 테러를 기획하는 구니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반항의 통쾌함 같은 건 없다.

그렇지만 그 시절 그 세계를 생동감 있게 구현하는 능력은 역시 대단하다. 가정용 전화기가 처음 보급되는 시기, 그 시기에 맞는 경찰의 수사 방식이라든가, 경찰 조직 내 관료주의라든가. 이런 요소들이 굉장히 세밀한데, GHQ(점령 미군 사령부)의 일본 통치로 인해 일본 본토 치안 조직의 약화, 야쿠자 부흥 같은 배경이 이야기에 녹아 있어서, 그 시절 그 세계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긴 했다. 그리고 역시 오쿠다 히데오 이야기의 백미는 인간 개인을 향한 따뜻한 애정인데, 비극적 이야기 속에서도 매춘 여성이 머리를 굴리는 대목이라든가, 노인 경비가 자기 자랑을 하는 대목 같은 아주 소소한 대목에서 그런 애정이 느껴졌는데 그 소소한 대목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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