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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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은, 김모미가 되지 못한 나스따시아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비극적 사건이나 이야기의 구성 자체보단 당대 세태를 보는 재미가 더 있었다.

<죄와 벌> 다음 출간한 장편으로, 근대 제정러시아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이 도시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 동시대 소설의 배경이 된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는 사회 전방위에서 근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등장인물들도 세속적 인물,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인물, 자유주의자 또는 니힐리스트의 범주 안에 있다.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인물들이 소설의 주된 화자다. 백치인 미쉬낀 공작과 팜므파탈 나스따시아는 각자 백치라서, 또는 복수를 꿈꾸는 여성으로서 유사한 방식으로 세태를 거부하고 각자 사랑과 연민, 복수에 매진한다. 미쉬낀의 ‘사랑과 연민‘은 전형적 풍속소설의 플롯을 벗어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 문장이 세련되기 때문에 지루하진 않지만, 여하튼 예상을 벗어나는 새로움은 없다. 주변 남성들의 도덕적 치부를 자백하게 하는 나스따시아의 복수는 자기파괴와 주변인 모두의 파국으로 이행되어 통쾌함보다는 안타까움만 남긴다. 더글로리 문동은 식의 ‘제 손에 피 안 묻힌 복수‘라든가, 마스크걸(웹툰) 김모미 식의 광란의 응징도 아니어서 복수 자체는 그 주체성의 부족 탓에 심심한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시대에서는 강렬한 인물이었을 테다.

주된 사건 이외에 군더더기가 많은 편이다.(매수당 원고료를 받았을 거 같다) 하지만 군더더기도 당시 세태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나름의 흥미가 있다. 작가 본인의 유배 생활에서 비롯된 경험담, 니힐리스트들을 풍자하는 일화, 간질 발작이 시작되는 과정(작가 본인이 간질에 오랫동안 시달렸다)에 대한 세세한 묘사 등이 전개되는데 특히 연적이자 친구인 로고진에게 살해 위협을 받기 직전에 묘사되는 간질 발작에 대한 묘사는 신기하기도 하지만 이후 이야기 전반에 긴장감을 걸어준다.

소재로 나오는 한스 홀바인의 미술작품 <죽은 그리스도>와 러시아 철도가 당대 뜨거운 이슈이기도 했던 사상과 관련한 지형을 드러낸다. 죽은 그리스도는 세속적 인물 로고진의 집에 걸린 복제품으로, 그리스도의 시신이 부활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부패한 상태로 그려졌다. 니힐리즘이자, 로고진을 설명하는 이미지다. 러시아 철도는 재미있어 논문도 찾아봤다. 영국보다 뒤처진 러시아 철도는 1830년대에 일각에서 건설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그 효용성이나 비용 문제로 학계나 왕정의 불신을 얻었다.(당시 처음 제안된 철도 모델은 50인 이하 탐승 시 말이 견인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제국주의 침략 정책을 추진하던 제정 러시아의 이해에 맞아지면서, 이후 국가가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작중 첫 장면이 빼쩨르부르크로 향하는 기관차 객실에서 미쉬낀과 로고진의 조우다. 이후 각 장의 서두에 철도 관련 언급이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부러 철도에 함의를 담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세속적 당대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소재다. 더불어, 파국으로 향하는 등장인물들의 불가피한 상황도 암시하는 듯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쉬낀의 입을 빌려 세속적 세태와 사상, 이 때문에 비극으로 치닫는 인물들이 구원을 얻을 길은 연민, 특히 미쉬낀이란 인물이 표상하는 그리스도적 연민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점은 사형 선고라는 작가 본인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한 착하고, 심심한 결론처럼 보인다. 그래서 차라리 나스따시아의 서사에 애착이 가는 나는 나스따시아가 예수처럼 살해당하지 말고 차라리 살해하는 범죄스릴러가 됐으면 더 명작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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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자네의 연민이 나의 사랑보다 강렬하다는 걸세˝
무언가 잔인하고, 당장이라도 표출시키고 싶어하는 어떤 것이 그의 얼굴에서 타올랐다.
˝자네의 사랑은 증오와 분간이 안 되네˝-331p
...
로고진은 자신을 비방하고 있다. 그에게는 괴로워하고 연민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이 있다. 그가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상처받은 그 반 미치광이 여인이 무척이나 가련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게 될 때, 그는 지금까지 그녀로 인해 고통받았던 모든 것을 용서해주지 않을까...연민은 로고진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와 교훈을 줄 것이다.-3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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