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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1.
내가 가진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어째서 타인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개인은 타인에게 그토록 무관심한가? 2014년의 그날을 어째서 누군가는 사건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사고에 불과하다고 하는가? 나는 그것에 분노하는데, 이 분노는 개인적인 것인가, 혹은 정당한 당위적 분노인가?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에서 그 답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 것은, 계간 문학동네의 2014년 겨울호를 읽고 난 뒤였다. 류보선 평론가는 그의 글에서 바디우와 조르조 아감벤을 인용하며 세월호의 사건적 성격을 밝히고, 우리 세대는 더이상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만일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시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윤리에 크게 동의하며, 그가 인용한 바디우의 윤리학과 아감벤의 책들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2.
바디우는 먼저 현대의 윤리를 해체한다. 그 윤리의 기반을 밝히고, 그 기반의 허구성을 증명하며 윤리적 체계의 모순을 드러낸다. 바디우에 의하면 현대의 윤리학은 인간의 동물적 피해와 타인의 윤리학에 기대고 있다. 전자인 동물적인 인간의 피해자적 성격으로 윤리를 규정하는 것은, 악으로부터 선을 규정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예컨대, 인간이 입을 수 있는 동물적인 피해들을 규정한 뒤 그것을 행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살인은 악이고, 폭행 역시 악이며, 기타 모든 악행은 이처럼 피해자적 성격에서 규정된다. 그렇다면 선은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살인하지 않는 것, 폭행하지 않는 것, 추행하지 않는 것 등으로, 이미 규정된 악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가? 인간은 동물적인 존재로서만 정의되며 그것으로부터 선이 정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바디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동물적이지 않은 ‘불사의 존재’로서 거듭날 수 있는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 불사의 존재란, 이전까지 존재했던 자신의 모든 행동방식, 존재의 방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주체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존재가 주체로 거듭날 때, 그 과정을 바디우는 진리라고 말한다.

타인의 윤리학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행위를 윤리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윤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며, 나 역시 지금까지 동의해온 개념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이 역시 윤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타자와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를 규정할 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비-타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개인적인 기준이 아니며, 이미 정해져 있는 상징질서의 존재, 바로 서양남성으로서의 자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자를 인정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네가 이슬람교도가 아닌 한, 너의 인종이 흑인이거나 황인종이 아닌 한, 네가 일정 이상의 부를 누리며 특히 나와 같이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한- 나는 너를 존중한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바디우에 의하면 인간의 차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그것을 존중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어떠한 윤리도 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을 강조하기 시작한다면 어떤 모순이 발생한다.

“주장되는 것이 윤리적 원칙들, 인간의 피해자적 본질이라면, 주장되는 것이 권리가 보편적이고 시효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비행기로의 여행시간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가? ‘타자에 대한 인정’은, 그 타자가 바로 우리의 손에 닿는 곳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것일까? (...46p)”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진정한 윤리적 준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디우는 존재를 주체로 환기시키는 진리의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윤리는 사건과 관계되며, 사건이란 존재를 주체로 환원하는 것, 즉 모든 의견과 대립하며 지금까지 존재했던 자신의 존재방식 자체를 뒤바꾸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동물을 뛰어넘는(그렇지만 동물이 그 유일한 담지자인) 주체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이미 주어진 것’속의 그 일상적 기입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잉여적 부가물을 사건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진리가 문제삼아지지 않는(오직 의견만이 문제삼아지는) 다양태적 존재를 사건과 구분하다.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54p)”

이 과정은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일 수도 있고, 사회적 혁명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사랑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우리의 우주관을 뒤엎은 일대적 사건이며, 우리가 지난 겨울 겪은 촛불혁명 역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한 크나 큰 사회적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디우는 ‘사랑의 만남의 영향 아래 내가 그 만남에 실질적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나의 상황에 ‘거주하는’ 나 자신의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하며, 개인적 의미의 사랑 역시 사건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공백에서부터 발생했으며, 이것은 잉여적 부가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은 ‘잉여적 부가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방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윤리적 준칙은 어떻게 도출되는가? 그것은 사건의 성격과 관계되어 있다. 사건은 필연적으로 모든 의견에 대립한다. ‘-한편으로는 진리들의 윤리학이 의견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그리하여 전적으로 비사회적으로 된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라고 바디우가 밝힌 바 있듯, 사건은 본질적으로 공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존재를 주체로 환원시키는 무엇이기에 존재에게 주어진 모든 의견들에 대립하는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존재는 사건을 거부한다. 아니, 존재를 넘어 우리를 지배하는 윤리학은 이러한 진리의 과정 자체를 필연적으로 밀어낸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윤리학은 모든 의견들이 옳다고 말하며, 인간의 피해자적 본질로부터 윤리를 도출하므로, 도저히 주체적인 성격의 윤리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가 사건을 마주했을 때 가져야 할 준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충실성에 대한 충실함’이라고 표현되는, “계속하시오!”라는 준칙이다. 우리 사회는 지속해서 존재에게 사건을 사건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의 과정에 대해 회의하게 되며, 충실성에 위기를 맞는다. 사회는 오직 하나의 윤리인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훼손된 이미지에 따라 시험에 부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준칙에 따라 계속해야 한다. 그것이 윤리다.

3.
이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2014년 그날 이후로, 사건으로 존재했어야 할 그 일을,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훼손된 이미지들에 결합시켜 시험에 부쳤는가. 세월호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세월호 유족들이 시체장사를 한다-와 같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그 훼손된 이미지들. 우리는 그러한 시도들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세월호는 사건에서 사고로 전락하는 듯했으나, 결국 또다른 사건, 즉- 지난 겨울의 촛불혁명을 통해 새로운 대체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지난 겨울을 통과하는 동안, 지금까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멈추지 않았고, 그 사건에 대한 윤리적 준칙을 준수했다. 우리는 사건을 사건으로 명명했고, 그 결과로써 새로운 질서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내 질문, 어째서 사건을 사고로 전락시키려는 자들이 존재했는가? 그들에 대한 나의 분노는 윤리적인가? 에 대한 답변은 이미 이루어졌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들을 부정하는 사건을 거부하며,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바디우는 궁극적으로 말한다. ‘당신이 결코 두 번 믿지 않을 것을 사랑하라.’ 이것은 ‘당신이 항상 믿던 것만을 사랑하라’는 의견의 준칙과 반대되는 진리의 준칙이다.

내가 요즘 항상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운동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한 점에 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은 지도를 완성하는 순간 자신이 하려했던 작업의 의미를 잃는다. 해안선은 요동치고 땅은 깎여나가며 길은 언제나 새롭게 돋아난다. 그는 결코 완벽한 지도를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지도제작자의 모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역시 언제나 변화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도 변화한다. 그렇다면 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의견으로 구성된 윤리의 준칙이란 지도제작자의 완성된 지도와 같은 것이다. 어떠한 윤리를 절대적인 준칙이라고 주장해도 그것은 결코 진리를 담지하지 않는 불완전한 윤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바디우의 윤리학은 신뢰가 간다. 그의 윤리학은 절대적인 동시에 운동하는 무엇이다. 모든 윤리는 개개인이 겪는 진리의 과정 속에 있으므로, 그 진리의 과정에 따라 윤리의 양태는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진리의 준칙은 오직 하나, “계속하시오!” 그것이 윤리의 모방과 같은 ‘시뮬라르크’로 의심될 지라도, “계속하시오!”, 그것이 끊임없이 사회의 거부로 훼손된 이미지들에 부쳐질 지라도, “계속하시오!” 오로지, 그것이 진리임을 믿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계속하시오!”에 따라, 충실하는 것이 운동하는 윤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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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김연수 지음 / 세계사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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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김연수가 쓴 책이라면 뭐든 좋다며 읽어대던 나의 20대가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첫 장편이자, 내게 남은 마지막 장편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를 읽었다. 이 책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일단 1994년 초판이 나온 뒤로 다시 세상에 나온 적은 없어보이는 데다가, 전국의 도서관 중에서도 이 책이 비치된 곳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진천까지 가서 진천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이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었다. 다시 반납하러 가야하는 길은 조금 귀찮긴 하다.

자그마치 김연수의 처녀작이다. 그의 등단은 1993년 작가세계의 시부분 당선을 통해서 였다지만, 그의 회고에 의하면 처음 써본 이 소설에 의해 그의 인생은 180도 뒤바뀐 것이다. 그의 암울했던 방위시절, 매일 대대장 관사에서 멍청한 대장의 아들놈을 가르치다가 퇴근한 뒤 어두운 방에서 써내려갔다는 이 소설은, 지금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그의 따듯한 시각과는 거리가 먼 정서가 담겨있다. 염세적인 세상에 대한 시선과 회의주의적인 관념들이 가득 담겨있는 이 책에는 청년 김연수의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달까.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소설이 쓰여지던 시대, 그리고 이 소설을 쓰게 된 세대가 자라난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970년에 태어난 김연수의 세대는, 박정희의 유신정권 아래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1980년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로 들으며 자랐으며,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얻어진 87년 대선을 투표권이 없어 두 손 놓고 지켜봐야만 했으며, 그 결과를 망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세대였다. 게다가 1989년 독일이 통일된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세계를 구성하던 거대서사가 붕괴되는 것을 목도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김연수의 이 소설에는, 이 시기를 관통한 그 세대의 유전자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2.
주인공인 최민식과 송찬명은(그들은 각각 김연수와 김중혁의 소설 속 이름이다) 과거에 만났던 지산스님을 통해 알게 된 ‘의식 바이러스‘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계기로 ‘바이러스 연구소‘라는 엉터리 연구소를 세우고 그 안에서 단순한 번역사업에 매진한다. 이름만 바이러스 연구소일 뿐,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이 ‘예쁜 영희씨‘라 부르는 한 명의 직원을 두고 별 돈이 되지 않는 잡다한 글들을 번역한다. 그러던 중, 어떤 거대한 국가적 음모에 휘말려 그들은 더이상 평범한 자신들의 일상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그 사건에는 ‘알려지지 않은 제너럴 박‘도 등장하고, 배후가 짐작되지 않는 일명 ‘가칭파‘도 등장하고, 이론적 배경이 되는 ‘허구를 반영하는 현실이론‘이라던지, ‘의식 바이러스‘같은 이상한 말들도 쏟아져나온다. 그리고 ‘기관‘과 일본의 ‘신풍파‘는 이 세력들의 싸움 속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애쓰고, 그 결과로 엉뚱하게도 최민식과 송찬명이 사건의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이런저런 세력들의 권력다툼에 등이 터진다.

전체적으로는 국가적 음모 속에 휘말린 평범한 개인들의 분투기로 읽히는데, 사실 속을 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직설적인 우화로 보인다. ‘알려지지 않은 제너럴 박‘의 세력은 일본의 ‘신풍파‘를 끌어들여 ‘가칭파‘의 ‘허구를 반영하는 현실이론‘을 파괴하려 하고, 그 결과로 ‘신풍파‘의 이론에 따라 한국의 경제권을 일본에 종속시키고 일종의 전체주의를 실현하려 한다. 이에 반대되는 ‘가칭파‘는 ‘허구를 반영하는 현실이론‘에 따라 새로운 전체주의를 실현하려 한다. 그들은 허구와 현실의 중첩세계를 움직여 세계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허구를 반영하는 현실이론‘을 실행하여 현실세계의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현실세계에 곧 대두될 모순이란, 바로 전체를 지도하는 이념이 부재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벗어난 세계주의의 관점에서 전체주의를 실현해 인간의 의식을 통일하고 개혁해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배후에는 미국을 위시한 거대자본의 초국가적 기업들이 연관되어 있다고 암시된다. 그리고 이들을 최후에 배후에서 움직이는 존재가 있으며, 이는 국가적 전체주의를 배경으로 국가 전체를 완벽하게 지배하고자 한다.

이 세력들 사이에서 최민식과 송찬명은 이형욱이 마지막에 만나 ‘허구를 반영하는 현실이론‘의 결함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고초를 겪는다. 알려지지 않은 제너럴 박의 안가에서 송찬명은 구시대적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고, 최민식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들이 듣지 않은 결함에 대해 깨닫게 된다. 하지만 송찬명의 내부는 처참히 무너졌고, 결국 후반부 이후로 송찬명은 실종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최민식은 자신을 돕는 형사 김종휘와 함께 이 모든 사건들의 발단이 된 ‘허구를 반영하는 현실이론‘을 만든 지산스님을 만나기 위해 강원도로 향하는데, 여기서 모든 일의 시작점이 밝혀진다.

3.
요약조차도 난망한 이 복잡한 서사를 제대로 쫓아가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시대의 복잡성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저마다 지도이념을 부여잡기 위해 자신만의 논리를 내세우며 새로운 권력을 차지하려 나선다. 그 이론들이란 신자본주의, 제국주의, 국수주의, 전체주의 등 너무나 많고 복잡하며 이들이 서로 얽혀있기까지 하여 제대로 설명하려 한다면 인물과 이론들을 그려놓고 선으로 표시하는 일종의 관계도가 필요할 지경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최민식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읽는다면 의외로 간단하게 읽힌다. 구세대의 부패한 유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현 세대의 불안, 회의, 피로감 같은 것들이 읽힌다. 투덜이로 명명된 최민식은 시종일관 회의적인 태도로 시대를 이야기하지만 꺽다리 송찬명은 대체 이것들이 다 뭐냐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 마음들을 시종일관 내비친다.

어쩌면 이들 모두는 작가의 분열된 자기를 표현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송찬명도, 최민식도, 이형욱도, 이지산도 모두 김연수의 또다른 모습에 다름 아닐까. 이 소설에는 다양한 장치로 포스트모던적인 실험을 시도한다. 애초에 작가 본인이 등장해 소설의 집필 의도를 설명하고, 자신에게 소설 집필의 동기를 준 친구 서원기의 편지가 각 장의 중간에 삽입되어 소설의 형식적, 내용적 측면을 무자비하게 까내린다. 그러면 또 김연수가 등장해 그 비판에 대한 변명을 하고, 마지막에는 소설이 끝난 뒤 김연수와 서원기, 최민식과 송찬명과 이지산이 등장해 한바탕 소설에 대한 토론까지 마치니 이런 형식이란 전무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까지 힘을 내어 읽고 나면 이 소설 한 권을 쓰기 위해 김연수가 얼마나 시위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분열된 자기이며, 그들의 목소리 모두가 김연수의 목소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연수의 변명은 참된 변명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해된달까. 뿐만 아니라 토론회에서 이 소설에 대한 비평들-예컨대 캐릭터가 소모적으로 쓰여진다던가, 문제적 개인으로 대변되는 것은 송찬명인데 최민식이 주인공이 됨으로써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던가, 문학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해야할 작가의 본분이 이런 미스테리물, 즉 대중문학의 형식을 빌린 점에서 태만한 것이 아니었나- 또한 이해된다.

마냥 좋다고 말하기에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세련됨이 부족하고, 송찬명의 말마따나 중간중간 유력해보였던 캐릭터들이 빛을 잃고 실종되며,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이란 ‘이 세계는 세계를 사랑하는 자들의 것이다‘로 회귀하는 소설의 주제에는 물음표가 찍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지산이나 서원기의 비판과는 다르게, 미스테리물의 형식을 빌린 이 이야기의 흡입력은 대단하고, 세계가 붕괴된 뒤 여러 가치관들이 격돌하는 모습을 우화적으로 그린 은유를 통해 시대의 복판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작가의 모습이 제대로 비춰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고초를 겪은 최민식이 세계를 일정부분 긍정하는 모습은, 그리하여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세력들의 허구적인 이론들을 밀어내는 모습은 꽤나 호의적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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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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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어떤 표피를 치밀하게 묘사한 결과로서, 오히려 그 내면이 깊숙하게 드러나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이 소설집이 그런 경우인데, 철저하게 의도된 건조하기 그지없는 문장들로 이 세계의 겉모습을 그려낸 작품들을 읽다보면, 문득 그 속에서 우리의 내면에 감춰진 어떤 부패한 감정들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이 소설에서 읽혀지는 어떤 정서가 있다면 그것은 분노, 혹은 공허, 아니면 절망과 같은 어둡고 축축한 그런 감정들이다.

총 8편의 단편들이 하나같이 이런 끈적하고 뜨거운 분노를 담고 있다. 그 분노란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우리는 왜 이 세계의 한 면에서 도대체 벗어날 수가 없는가. 폐쇄회로를 돌고 도는 하나의 미립자처럼 우리는 도저히 이 어둡고 축축한 침묵의 순환고리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은 사회구조의 밑바닥에서 이루어지는 불우의 매커니즘이며, 그 속에서 탄생한 광기의 기록이다.

낡은 빌라 안에서 전염처럼 퍼져가는 광기를 경험하는 개인을 그린 ‘누가‘와 서비스업 종사자의 굴종해야만 하는 심리 속 복잡한 사고를 그린 ‘복경‘은 그런 점에서 가히 광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조용한 곳을 찾아 자신의 형편에 맞는 빌라에 이사했을 뿐인데, 그곳에서 윗집 아주머니의 기이한 방문을 겪은 ‘누가‘의 주인공은, 단순히 미친 여자의 하소연으로 그 방문을 기억 속에 묻어버린다. 하지만 같은 형편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 곳에서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그녀 역시 미친듯이 위층에 물건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고, 이 소설의 마지막은 ‘아래층이야 씨발년아‘라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같은 공간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들의 계급을 나타내며, 그 계급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울의 굴레가 그들을 광기로 몰아 넣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들 내면에 광인이 존재했다는 것인가, 사회적인 구조가 그들을 광인으로 내몬 것인가? 서비스업 종사자의 내면을 그린 ‘복경‘에서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룬다. 모두가 모두를 미워한다는, 오히려 손님들보다 같은 층의 동료들을 대하는 것이 더욱 역겹다는 주인공은 매일같이 의무적인 미소를 띄며 손님을 맞는다. 손님이 구매하고 사용한 지 몇 달은 되었을 이불을 가져와 환불을 요구해도 죄송하다며 웃고, 상사가 너무 웃어서 너 재수없다고 말해도 미안하고 감사하다며 웃는다. 그녀는 그 웃음을 과연 웃음이라고 불러야만 하는가, 다르게 이름붙여 웃늠이라고 하면 어떠한가 라고 말하며 계속해서 웃는다. 그 속에서의 굴레는, 그녀의 상사인 매니저가 쉬는 시간이면 백화점 주변 지하상가를 찾아 아무 물건이나 구매한 뒤 클레임을 거는 취미를 은밀하게 고백할 때 드러난다. 모두가 웃늠을 웃는다. 웃늠을 웃지 않는 것은 특권이며, 그들의 세계에서 그런 존재는 없다. 웃늠을 웃지 않는 존재들을 그들은 인격적으로 상대하지 않으므로. ‘상류엔 맹금류‘ 에서의 똥물 역시 그런 내리절망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이런 우울한 세계 속에서 상실하는 이야기들이 뒤섞여 소설집을 더욱 슬프고 씁쓸하게 만든다. 도서관 알바생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인물이 우연히 한 소녀의 실종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뒤 겪는 이야기인 ‘양의 미래‘에서는, 주인공이 하나의 믿음으로 세계를 살아가다 결국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 뒤 목도하는 세상의 차디 찬 일면이 그려진다. 가장 슬픈 단편 중 하나인 ‘명실‘에서는 치매가 걸린 인물의 내면에서부터 붕괴해가는 그야말로 세계의 종말이 담겨 있다. 명실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내용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자신을 상실해가는 과정의 면면이 충실히 담겨있다고 할 수 있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독특한 문체와, 비-구성적인 형식은 실제 인물의 침식되는 자아를 무엇보다 탁월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웃는 남자‘가 가장 슬프다. 자신의 어둡고 외로운 방 한가운데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어떤 순간을 생각하는 남자. 그 남자는 디디라는 인물을 기억한다. 그이의 마지막 순간을 계속해서 떠올린다. 그리고 자책한다. 디디의 마지막 순간에, 그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마음먹었던 모든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이를 붙잡는 대신에 자신의 가방만을 움켜쥐었던 것일까. 그는 다른 사건을 동시에 떠올린다. 오래 전, 퇴근 길 버스 정류장에서 힘을 잃고 자신을 향해 쓰러지던 노인을, 그 노인을 반사적으로 피한 뒤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탄 자신을. 그리곤 두 사건을 연결짓는다.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피하는 사람은 몸을 피하기 마련이고, 가방을 움켜쥐는 사람은 역시 가방을 움켜지게 되어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 사람의 본질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히 낯선 이의 살 수 있었던 목숨을 죽게 만들었다면, 혹은 자신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눈 앞에서 지켜보게만 했다면, 그런 사람의 죄책감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생각 속에서 웃는 남자의 그 남자는 계속해서 생쌀을 씹으며 방 안에서 생각한다, 그 사건을, 디디를, 마지막 순간에 가방을 움켜 쥐던 그 때의 자신을.

전체적으로 퍽 우울하고, 씁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을 상실하고 구원받지 못하거나, 정해진 계급적 생태계 속에 분노와 광기로 삼켜지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작가의 끈적한 분노나 광기가 읽혀진다. 그의 건조한 문장들은 오히려 뜨거운 분노로 느껴지고, 서늘하고 차가운 문장들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는 듯하다. 그리고 뜨겁고 건조한 문장들이나, 서늘하고 차가운 문장들에는 모두 어떤 구멍이 있다. 모래지옥이나 크레바스같은 그 절망의 구덩이들 속에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갇혀 소리를 지르지만, 우리는 보통 그 목소리들에 귀기울이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간다. 작가는 그 목소리들을 심연 속에서 견인해 우리에게 들려준다. 때로는 파격적인 단어들로, 충격적인 이야기들로, 혹은 퍽이나 쓸쓸하고 슬프기 그지없는 문장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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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스트의 추천으로 연휴 동안 이 책을 읽었다. 배명훈의 단편들이 시기와 분위기를 넘나들며 고르게 담겨 있었다. 이 소설을 읽고 장르문학과 문단문학이라는 구분에 대해 알았다. 문단문학은 등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장르문학은 이에 대응하는 어휘로 데뷔를 쓴다는 것도 알았다.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는 어디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글들 중에는 그런 성향이 짙은 것들이 꽤 많다. 또 배명훈의 이 소설들을 읽어보면, 충분히 문단문학에도 발을 디딜만한 아름다운 것들을 찾게 된다. 굳이 그 둘을 양분하고 탐독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편의상의 구분, 문학의 실천에 대한 방법론의 구분으로만 생각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집에는 장르적으로는 SF에 속하는 소설들이 모여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묶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는 실현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과학지식들로 충분히 상상 가능한 어떤 소재들을 사용해서 소설을 썼을 때, 우리는 그것을 SF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설들의 영역에서 기대하는 어떤 재미가 있을 것이고, 그것들에 충분히 부응하는 소설들이 일반적으로 SF소설로 인식되고 읽혀왔을 것이다. 하지만 배명훈의 이 소설들에는 좀 더 많은 다양성이 보인다. 가능성이라고 말해도 좋다.

‘스마트D‘나 ‘홈스테이‘같은 작품들에서는 숨가쁘게 움직이는 플롯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특히 배명훈의 데뷔작인 ‘스마트D‘에서 구사된 문장들의 신선함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D라는 글자에 대한 저작권을 행사하는 초국적 거대기업의 감시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설 속 주인공은 D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글쓰기를 구사한다. 키보드에서 D라 함은 우리 글에서는 자음 ㄷ에 해당한다. ㄷ이 제외된 글쓰기가 가능할까? 놀랍게도 배명훈은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을 빌려 ㄷ을 제외한 이야기를 매끄러운 문장으로 어색하지 않게 들려준다. 그 소설의 마지막 역시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충격적인 발상은 인류멸망의 스토리를 담은 ‘유물위성‘이나 ‘예언자의 겨울‘에서도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배명훈이 갖는 정서는 ‘키치‘인 것으로 생각되는 단편이 몇 있다. ‘티켓팅&타겟팅‘과 ‘예술과 중력가속도‘, ‘예비군 로봇‘등이 그러하다. 이 소설들에서는 과학적 상상력이 닿는 한에서 설정되는 제한된 공간/시간 속에서 그 과학적 상황을 겪어내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웃음과 재미를 안겨준다. 그러한 재미는 온전히 배명훈의 엉뚱한 발상과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을 실현시킬 현실에 발딛은 지식들에서 기인한다. 그 상상력이란 이런 질문들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핵잠수함에 근무하는 빠순이(비하의 표현이 아니고.. 관용어로서 사용하는 것이다)들의 피튀기는 티켓팅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달에서 태어나고 자란 무용수가 지구에 귀환한다면?‘, ‘단순한 로봇 조종사가 화성 개척에 자원하여 참여하는데, 그 조종하는 로봇이 동원대상자원이라면?‘과 같은 질문들. 질문만 보아도 호기심이 일지 않는가. 배명훈은 그 호기심을 훌륭히 충족해줄 탁월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단연 독보적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무래도 ‘조개를 읽어요‘, ‘초원의 시간‘, ‘양떼자리‘와 같은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작품들이다. 조개를 읽는 고고학자가(아마 이런 고고학 분야는 작가의 상상일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이 분야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어떻게 그 유명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조개를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구구절절히 설명하는 독백문의 형식을 빌린 ‘조개를 읽어요‘는 이 소설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조개를 읽는다는 행위에서 오는 추상적이고 서정적인 작업의 분위기도 매력적이고 드문드문 드러나는 아름다운 문장이나 유머도 마음에 들기 때문이지만, 역시 이 소설이 한 사람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화자는 계속해서, ‘아니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나도 많이 고민했지‘ 하는 식으로 둘러대지만, 사실 그의 인생은, 그의 작업은 모두 한 대상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을 참 좋아한다. 조개들이 하는 말들은 너무 귀엽고, 화자의 감정은 서글픈 동시에 애틋하다.

‘초원의 시간‘과 ‘양떼자리‘는 단순한 SF를 넘어 환상적인 분위기까지 담지하고 있다. 실제로 타임머신이 미래에 개발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개발할 어떤 인물이 현재 이 장소에서 죽을 위기에 처해있다면, 그는 어떤 방식으로 생존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관여하는 인물은 어떻게 그 사실을 깨닫고 그 인물을 구출할 것인가? 마치 스릴러의 플롯처럼 들리지만 배명훈은 이 이야기를 아주 근사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런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작가이기에 다른 키치한 작품들에도 신뢰가 간다. ‘양떼자리‘에서는 그의 핍진한 문장력이 더욱 빛을 발한다. 몽골 초원의 양떼지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회고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이 소설 속 문장들은, 그야말로 ‘진짜‘ 몽골의 양떼지기의 문장들처럼 보인다. 심지어 몽골인의 문장들을 한국어로 들려주는데도, 그 문장들은 틀림없는 몽골의 양치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그 몽골의 늙은 양떼지기 역시,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아름다운 밤하늘의 양떼구름 속으로 걸어간다. 이 역시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이렇게 충실한 완성도와, 분위기를 넘나드는 다양성을 고루 갖춘 이 소설을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다. 즐겁고 유쾌하며, 두근두근하고 섬뜩하고, 아름다우며 환상적인 소설들이 책 한권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가장 좋아하는 ‘조개를 읽어요‘는 그 뻥의 질이 좀 대단해서, 실제로 있는 직업인 듯한 착각을 들게 하는 재미도 있기에, 나중에 누군가와 만나서 책 얘기를 하면 나도 그 뻥을 좀 쳐보려 한다. ‘조개들은 일평생 한마디만 하며 산다는데, 그거 알아? 조개의 나이테를 보면 그걸 읽을 수 있지, 나도 좀 읽을 줄 아는데 말야.. 이 조개 좀 봐봐..‘



+ 소설속 수 많은 은경씨와 희나씨는 작품에 해설을 붙인 정이랑씨의 글에서도 의도가 읽히고,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된 바 있으므로 더 이야기하지 않는다.
++ 다양한 시기에 걸쳐 쓰여졌다는 소설들이 공간적인 무대를 통해 몇 편이 연결되기도 하는데, 그런 지점들 역시 흥미롭게 읽혔다. 이래저래 읽을 재미를 찾기에 다양한 장치가 숨어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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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부터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딕테를 읽었다. 이것 역시 절판된 지 오래여서 손에 넣기까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빌릴 수 있었다. 구한 뒤 읽기 시작한 뒤로는 완독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차학경이라는 사람의 간단한 약력 정도만 알은 채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그것은 이 책에 한해서는 꽤나 비효율적인 독서법이라 할 수도 있었으며, 동시에 순수한 문장을 탐독하는 최적의 독서법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그리 쉽게 읽힐 만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분류부터가 그렇다. 창작집이라니, 대체 이 텍스트는 소설인가 에세이인가 비문학인가 사회과학인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쉽사리 내려지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의 시신들을 호명하여 각 장을 주관토록 하고, 각 장에는 작가가 소환한 시대의 인물들, 여성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구성한다. 저자 본인의 이주시기의 시간들로부터 시작된 받아쓰기(딕테의 의미다)의 문장들, 유관순과 잔다르크와 저자의 어머니, 성 테레사 등의 여성들이 각 시대를 짊어지고 등장해 아름다운 문장들로 구성되어진다. 몇몇 이야기를 제외하면 서사적인 구성은 거의 없다. 다만 흩날리는 문장들, 시제를 버리고, 수 많은 양태들로 분열하는 문장들이 꽃 피우듯 산개한다.

모어와 모국어가 다른 디아스포라 문학가의 필연적인 혼란, 이중언어사용자, 삼중언어사용자의 고독이 문장들로 표현된다. 문장들에 담긴 의미로서가 아니라, 다만 그 문장들 자체로서. 그런 문장들은 식민지 시대의 민족적 수난이나 뜨거운 혁명들을 불러오기도 하고 시적이고 신화적인 서사의 결정체를 채광하기도 한다. 그런 지점들에서 순수한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이 체험된다.

여러 번 읽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싶은 책이다. 어느 페이지던 펼치고 문장들을 곱씹으며 차학경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다만 책은 빌린 것이기에 그 가능성이 요원하다. 최근 읽은 소설 중에 조해진의 ‘빛의 호위’에는 차학경과 그녀의 여동생이 모티브가 된 소설이 등장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이 책에서 차학경이 쓴 화법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과 자신의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추억한다. 그리고 차학경의 여동생이 쓴 편지를 떠올리며, 장거리 여행이 거의 불가능한 자신이 어째서 UC 버클리로 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는, 참으로 아프고 슬픈 이야기, 그러니까 삶이 포기되는 순간과 그 채무감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에 대한 굵직한 울림이 드러난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보니 그 소설도 생각나고, 여러모로 단일한 텍스트로 여겨지지 않는 책이었다고나 할까.

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왠지 모를 애착을 갖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고. 나도 종종 꺼내 읽게 되었다. 진천말고 다른 가까운 곳에 책이 있을 수 있다면 좋겠네.

+ 아래의 문장이 조금씩 이해되고 있다. 조수형 인간들이 대체자의 욕망만을 욕망하듯이, 자신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운동하는 인간들은 오로지 움직임 자체를 목적지로 삶고 움직이는 것이다. 종래에는 목적지 자체를 영구히 유배시키고, 그것에 닿으려는 움직임 자체만을 목표하며, 그렇게 영구히 움직인다.

˝우리의 목적지는 찾기를 위한 끊임없는 몸짓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의 영구한 유배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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