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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ㅣ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가족의 탄생
한 가족을 상상해 보자.
아버지는 이른바 유신 세대이다.
박정희 시대에 경제활동을 시작하였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라는 정치적 모티브를 실천하며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포디즘을 바탕으로 한국경제의 영광의 30년 동안에 20대에서 40대를 보내신 분이다. 같은 연배의 친구들과는 지연과 혈연을 통한 단결력이 높으신 분으로 경제 위기 이야기만 나오면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길이 살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요즘은 조기퇴직이다 명예퇴직이다 하는 통에 불안한 노년을 맞이하시느라 비어가는 담배 갑에 손이 가는 일이 잦아지고 계신다.
30대인 첫째 아들은 이름도 아리송한 386세대인데 68년도에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 젊은이들을 열광케 했던 68세대의 한국적 표현형으로 ‘베이비 붐 세대’라는 다산(多産)스런 별칭도 가지고 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을 보니 정치적으로 또래간의 단결성이 매우 높아 대선 때만 되면 낙선운동이니 정권교체니 하며 부산스럽게 굴더니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을 두 번이나 당선시키고 비슷한 나이의 국회의원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니, 학생 때는 머리도 맘대로 기르고 교복도 안 입고 다니고 책도 많이 읽으며 자주 주장이 강해 자유, 저항, 낭만 등의 단어들을 많이 쓰기에 생각이 트여있고 개방적인 줄 알았는데 술자리에서 학벌 따지고 드는 폼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그래도 직장잡고 결혼하고 사회 생활하는 모양이 부모님 입장에선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지난달에는 원정 출산도 다녀왔다.
문제는 20대인 둘째 아들이다.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고시준비생 둘째 아들.
우리나라 전체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인 119만원에 20대의 임금 비율인 74%를 곱했더니 떨어지는 숫자가 88만원. 그래서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둘째 아들 말이다.
98년도에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이후 10년 만에 등장한 세대인데 일단 형과는 달리 말 수도 없고 항상 우울해 보이는 인상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괜찮은 대학 들어가 공부도 열심히 했고 토익 점수도 좋았는데 형과는 달리 이상하게 취직이 안 된다. 이 마을 저 편의점에서 알바를 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가만 보면 친구들도 그런 경우가 많아 보인다. 형이 보기엔 마음이 아프면서도 커피는 스타벅스만 찾고 핸드폰도 유행 따라 바꾸는데 정치판 돌아가는 일에는 무관심한 것 같아 좀 괘씸하기도 하다. 요즘은 관공서 취직한다고 행시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아는 분위기다. 일찌감치 퇴직한 아버지는 집에 눌러 앉을 아들 눈치에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다.
<88만원 세대>는 결국 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 이다.
정치적, 경제적 성향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오해가 격자무늬처럼 촘촘하게 얽혀가는 가운데 애증의 감정과 갈등이 뒤 섞여 돌아가는 일종의 드라마 인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작명을 하자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한민국 가족 로망스’ 정도면 될 듯 하다.
아버지 세대는 첫째 아들 세대와 경쟁도 했었지만 이젠 사회적 진입장벽의 gate keeper로서의 역할을 이양할 기세이다. 둘째 아들이 얹혀사는 통에 싫은 소리도 자주 하지만 본인도 명퇴를 한 뒤 집에서 쉬시는 처지라 꾸짖기도 거북하다. ‘실업 가족’의 밥상머리에 어색한 기운이 맴 돈다.
‘사오정’과 ‘오륙도’를 대신하여 대한민국 어느 세대보다도 빠르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름의 자리를 잡아가는 첫째 아들은 소위 386세대, X 세대이다.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세대 권력을 유지하고 누릴 분들이다.
둘째 아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일까? 1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유전자 형질이 변질에 되어 ‘지 애비 등골 다 빼 먹는' 돌연 변이가 된 것일까? 사실 주변 사람들 보다 본인 스스로가 답답하고 의아한 판국인 것이다.
Welcome To The Cruel World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에서 주인공의 친구 한결이는 의아하다는 듯이 이런 말을 한다.
“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는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은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 세대는 그중에서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193 page)
한결아 너는 잘못한 것 별로 없다.
여기서 우리는 88만원 세대를 이야기하고 부모 세대는 유신 세대를 가리키는 것 일테다.
저자는 일이 이렇게까지 안 좋아진 원인으로 ‘워싱턴 컨센서스’와 함께 등장한 신자유주의. 노동력 시장 유연성의 지나친 강조. 이로 인한 비고용직의 증가. 노무현 정권의 선택과 집중의 논리와 이로 인한 상위 기업 독점의 현장. 프랜차이즈의 범람과 중소기업의 몰락. 고성장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 등을 각종 자료와 소위 유럽 선진국이나 미국, 일본의 수치들과 비교하면서 숨 가쁘게 동시에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88만원 세대를 기다리는 것은 잔혹한 시스템의, 눈 먼 자본의 세계이다. 승자 독식의 배틀 로열, 개미지옥과 같은 근무 환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공무원이나 정부출연기관과 같은 하늘이 내린 직장은 고사하고 대기업 등을 통한 취업 역시 진입 장벽이 만만치 않다. 정신 놓으면 조직폭력단보다 열악하다는 다단계판매의 세대 착취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다. 자영업? 그들의 친구들은 프랜차이즈의 수호자이자 유순한 비정규직이고 마케팅에 잘 반응하는 질 좋은 소비자이다. 질 좋은 소비자는 대형마트에 간다.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지 의아해 하며 주의를 둘러봐도 개선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들의 문제를 의제로 올려줄 또래 정치인도 없고 ‘부모에게 기생을 하면서 독립하기를 포기한 세대’라는 차가운 시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Am I Blue?
스스로가 88만원 세대인 소설가 김애란은 그녀 세대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20대에게는 ‘어른’이 되지 않아도 될 때 주어지는 안락함보다, 어른이 될 수 없을 때 그 구조 안에서 느끼는 고통이 더 컸다는 것이다. 내가 또래 친구들에게 발견하는 공통점은 자책과 무력감이었다. 이만큼 교육받고도 뭔가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 이만큼 노력했는데도 안 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더 노력하지 않았거나 조건에 미달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 사회적으로는 효율성이라는 시스템 앞에 무력하고, 개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부추기는 욕망 앞에서 무력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비단 ‘88만원 세대’만은 아니겠지만, 사회에 진출하기도 전에 그것을 절실히 느끼고, 경제적 독립의 기회를 박탈당하기 시작한 세대는 지금의 20대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지금 이 사회가 바라듯, 내 주위 친구들은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다. 나는 이 무력감이 패배감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시사IN 2007년 10월 9일자 “20대에 대한 진단은 사실이고, 진실일까”)
‘88만원 세대’, ‘한국의 2030 빈털터리 세대’라는 다소 모욕적인 세대명의 주인공이 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나는 위의 무력감이라는 표현에 동감한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이에 대한 과중한 책임감과 무력감을 스스로에게 덧씌운다는 데 있다. 이런 경향이 매우 강한 것이 현재의 88만원 세대인 것 같다. 이 세대의 무력감을 그들의 무능력함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 세대가 이전 및 이후의 다른 세대에 비해 지적인 능력이 유의하게 낮고 사치에 휘둘리는 ‘부모들의 등골을 휘어지게’ 만드는 세대라는 식의 편견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취업에 준비된 세대이다.
동시에 이들은 취향이라는 계급에 의해서, 소비라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절대적 가치에 의해서 끊임없이 개별 단위로 분해되어 각자의 인터넷 공간에서 각각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고군분투, 전전긍긍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소비의 주체이자 동시에 마케팅의 대상인데, 구매력은 용돈을 받아서 사용하는 10대에 비해서 떨어져 주체로서의 지위는 위태로워지고 동시에 마케팅 대상으로서는 지나치게 유순하다.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한다는, ‘인류사에 전례가 없는 세대 불균형’이라는 표현이 문제의 시급성에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과장이라 할지라도 통제 불능의 자본에 의해 양산되는 무미건조한 ‘개미지옥’, 고작 5% 남짓을 위해 나머지가 아귀다툼을 해야 하는 세태를 반영한 한국형 ‘승자 독식 세대’, 만인 대 만인의 싸움에 몰린 세대 풍경 앞에서 20대들은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부의 힘에 압도당할 때 느끼는 감정, 곧 무력감이 다시 저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다. 시대의 우울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하거나 의사소통이 부재되어 있는 이들은 ‘한 명씩 자신의 골방에 은폐되어 고립되고 파편처럼 공격받으며 오히려 기성세대들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언급의 울림이 자못 크다.
유신 세대의 가치를 정면으로 돌파한 386세대와는 달리 88만원 세대는 윗세대의 가혹한 가치들에 쉽게 순응하고 순종한다. 이 우울한 젊은이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IMF 10년의 극복 과정과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가 결합하는 시기를 관통하면서 승자독식의 가치관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경제적인 동물이 되기를 강요받은 세대인 것이다. 산뜻하게 제거된 저항의 기운은 소비를 통한 계층화, 취향을 통한 개성화의 태도들이 대체한다. 시스템의 실패를 스스로의 문제로 개인화하고 또한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비하하며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무력감이 곧 우울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주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면 우울의 감정이라는 하나의 고상한 감정으로 승화되며 이를 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자 비로소 무력감은 우울증이라는 겉옷을 입고 등장하게 되며 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We Are In This Together
사실 흥미로운 점은 88만원 세대들이 착취당하는 방식보다는, 이러한 시스템을 결정하고 이를 위한 정책을 입안했던 윗 세대, 유신 세대들이 욕망하는 태도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1318 마케팅을 통한 인질 경제와 20대를 착취하는 비정규직 시장을 다루었지만 신자유주의 경제가 인질로 잡고자 하는 대상은 이러한 세대 범주를 넘어선, 물질에 대한 욕구 그 자체로 보인다. 유신 세대들 물론 당연히 마케팅의 대상이며 이들의 삶의 질, 소위 well-being에 대한 욕구는 이전의 어느 세대가 보였던 집착에 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성적 만족을 구하고 어머니들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탐하는가.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은 죄악이며 소비를 통해 이를 충족시키는 것은 미덕이다. 후세의 자원과 노동력을 탕감하는 소비와 자본의 시대에 죽음이나 늙음, 소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눈에 띄지 않는다. 소비자만 있고 어른은 없다.
어른이 없으니 문화 역시 부재하다. 서구 유럽 등과 비교할 때 우리는 이를 해결할 만한 자생적인 사회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 하다. 사실 쓰레기 분리수거도 잘 안되는 판국이다. 유신 세대 이전의 자생적인 운동의 역사도 부재하고 386세대는 그 윗세대에 반기를 들었지만 아랫세대에는 인색하다. 저자는 ‘배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저자들은 88만원 세대의 문제가 ‘당연하게도’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IMF 10년의 극복 과정과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가 결합되면서 돌출하게 된 피해자이자 앞으로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들이 노동자로서 가지게 될 비참한 모습을 먼저 경험하는 새 시대의 첫 세대에 해당된다.’ 동시에 지난 60년 간 누적된 대한민국의 세대간, 지역간, 계층간의 고질적 문제를 스스로 체화해 경고를 보내고 있는 ‘새장 속의 카나리아’ 같은 존재들이다. 대한민국 전 세대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Starting Over
이 책에는 다양한 해법들이 제시된다. 20대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기에는 응집력이 약하고 너무 파편화 되어있어 걱정이 되니 유일한 변수는 기성세대들이 20대에게 꼰대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라고 했다. 세대 간의 경쟁을 둘러싼 한국형 승자 독식, 상위 2% 독식의 문제에 대한 대화와 소통이 시급하다고 이야기한다.
88만원 세대의 소득이 높아지고 직업 안정성이 높아지는 방식으로 기존의 노동과 사회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며 여의치 않으면 88만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생활양식을 제공하거나 개인은 자신의 소비를 절제하는 더 생태적인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고 시스템은 낭비를 줄이고 경제적 약자를 더 고려하는 방식으로 변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를 하기도 한다. 성장률 보다는 성장의 패턴이 중요하고 비경제적인 요소들과의 조화가 주가 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인간에 대한 예의 등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자체의 미사용 예산, 10% 수준의 사업집행비 등을 이용하는 현실적인 대안을 언급하거나 볼보주의와 일자리 나눔의 사례를 예시하기도 했다.
이 책이 제시하는 해법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하고 일종의 순환 논리에 빠지거나 구호의 남발처럼 보인다는 점들인 것 같다. 하지만 우석훈, 박권일의 목적은 해결책의 제시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다보면 뭔가 동어반복 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이는 공저라는 집필 형식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문제 제기라는 본연의 역할에 매우 충실하다.
우석훈의 지난 저적인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에서도 느낀 점이지만,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소수의 소비자로 전락한 88만원 세대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상정하기 위한 저자의 다급한 태도가 나는 마음에 든다. 논리의 세련된 전개나 각주의 정성스런 나열보다 자신의 아랫세대의 문제를 빨리 모두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그 조바심에 경의와 감사를 보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책의 대안이나 그 대안의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윗세대의 따뜻한 조바심과 소통의 의지인 것 같다.
알폰소 쿠아론의 <Children Of Men>은 2027년이라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인데 원인 불명의 인플루엔자가 전 세계에 퍼진 뒤에 인류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 하게 되며 테러와 공황이 넘실대고 파시스트적인 영국 정부가 이민자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을 소름끼치게 묘사한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임과 유산으로 모든 아이들이 죽어버리는 상황은 나에겐 세대 착취의 그림자처럼 강렬하게 다가왔다.
자본에 의한 소비와 욕망의 무한 충족이라는 바이러스는 당연히 다음 세대의 인적, 물적 자원을 끊임없이 탐닉하게 된다. 글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되었을 때 88만원 세대의 선택은 그것이 자의적인 것이든 강요된 것이든 어떤 모습을 띄게 될까.
스스로 생산과 창조의 끈을 놓아버리는 불임의 세대, 절멸의 세대가 될 것인가. 나도 잘은 모르겠다. 뭐, 그래도 언제나 확실한 사실은 존재한다. 윗세대가 아랫세대를 경제적 착취의 대상, 성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에는 당연하게도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