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지처참 - 중국의 잔혹성과 서구의 시선 동아시아와 그 너머 1
티모시 브룩 지음, 박소현 옮김 / 너머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나의 경우, <능지처참>이라는 책을 집어 들고 읽어나가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 작용하였을 일종의 내적인 요인을 따져보자면, 중국의 형벌 제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보다 논리적으로 접근해 보자는 학습적 열망보다는 일종의 본능적 호기심이 더 큰 동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소위 ‘타인의 고통’에 대한 호기심인 것으로 '천 번을 절개해서 죽이거나, 살을 저며서 죽인다'는 능지형에 대한 초현실적인 묘사들이 이를 더욱 동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의 접근 방식은 신중하다 못해 다소 지루할 정도의 엄격한 진행을 보여준다.

제 1장에서는 청대의 혼란기를 틈타 악행을 저지른 왕 웨이친이라는 인물의 능지형을 묘사하고 추후 다루게 될 쟁점들에 대해 논의를 한 뒤, 2장에서는 명과 청 시기의 법령들을 살피면서 사형이라는 제도 내부에서의 능지형의 위치와 능지형을 집행하게 되는 세부 죄목들의 유교적인 측면들을 살핀다. 3장에서는 주로 능지형의 기원을 요나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해 보고 4장과 5장을 거치면서 각 시대별 법률집 속에서의 능지형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살펴본다. 특히 명나라 시절 홍무제가 능지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의 저서인 <어제대고>를 통해서 추적해 본 작업은 이 형벌이 국가 그 자체인 황제에게 가지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5장에서는 국가가 통제하고 처벌하는 대상인 민중들의 상상력 속에서 능지형이 어떤 위치를 점하게 되는지를 가상의 사후 지옥 순례기인 <옥력>이라는 기록물을 통해서 살펴본다. 능지형에 대한 서구적 왜곡이나 편견을 바로잡으려는 저자들의 강한 의지가 나름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임을 이해하지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6장, ‘서구적 관념 속의 중국적 고문’에 이르면 같은 주제의 끝없는 변주 속에서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이러한 모든 텍스트를 압도하는 4장의 처형 사진이 들어있다. 모든 사진들은 저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나름의 정서를 유발하는 역할을 하기 마련이지만, 이 4장의 사진들은 일종의 상처,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종류의 이미지들이다. 이 사진들이 들어있는 장을 지하철에서 읽다가 주변 사람들 신경이 쓰여 그냥 넘겨버리기도 했고 주변의 내용들을 건너 띄고 다음 장으로 황급히 넘어가 버리곤 했다. 그리고는 슬쩍 다시 들여다보기도 여러 번. 중국의 처형의 역사에 문외한인 나에게 그 형벌의 전후 과정이나 역사적인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 사진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즉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나 야만성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지기가 십상이었다. 이는 이 책 7장의 제목처럼 ‘능지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나 오해에 다름 아니겠지만 말이다. 서구적인 생활방식으로 살며 전근대를 탈피하도록 교육 받은 나에게 그 사진들의 이미지는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전후 사정을 따져보며 객관적으로 접근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4장의 사진은 아마도 청대 말기인, 1904년과 1905년에 푸주리에서 실행된 각기 다른 3처형 과정 사진 3장과 처형 이후 해체되어 시장 바닥에 전시된 신체를 담은 1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흑백으로 처리된 사진들은 당시 청나라에 머물고 있던 외국 재원이나 외교관, 선교사들이 찍어서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에 설치된 약 2.5m 높이의 장대에 머리가 결박된 사형수의 눈은 초점이 상실되었으며 어떤 감정 자체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 능지형의 집행인은 신속한 손놀림으로 별 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절개를 실행하고 있다. 신체의 일부분은 이미 훼손되어 떨어져 나간 상태이며 이를 둘러싼 군중들의 얼굴은 다소간의 긴장과 불안감 등을 읽을 수 있을 뿐 거의 표정 없이 굳어 있는 상태이다. 사진의 모든 등장인물의 표정은 비어있고, 이 비어있음은 언제나 묘한 억측과 오해를 위한 적절한 자리를 제공한다.

사실, 그림이나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나 묘사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거의 언제나 해설자 그 자신의 관점이나 그 자신의 시선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바라는 방향으로 주의를 이끌 뿐이다. 8장 전체를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 조르주 바타유의 경우는, 편집자에 의해 왜곡되었을 그의 집필 의도에 대한 음모론적 접근을 배제한다면, 그 사진에서 종교적 엑스터시와 폭력적인 에로티즘의 연관성을 관찰한다. 어떤 백과사전은 ‘황홀한 기쁨이 표현된 얼굴’이라는 급진적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한 영국인 사업가는 죄수의 살점을 군중들에게 던지는 집행인을 보며 이곳은 아직도 중세적이라 한탄을 하고, 다른 영사관 관리는 사형수가 묶여있는 장대에 십자가의 이미지를 투사한 뒤, 희생자에게 구원을 위한 희생의 드라마적인 요소가 없음을 아쉬워한다. 서구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취하거나, 보기를 기대했던 부분들이 발현되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해 심한 불만과 혐오감을 쏟아냈다.

저자들은 서구의 제의적인 처형과는 달리, 중국의 처형장은 일종의 교육의 장으로서 기능했음을 강조한다. 사형수의 신체는 아무런 드라마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준엄한 법률이 실현되고 집행되는 장소로서 존재하였다. 신체적은 고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집행전의 사형수는 아편에 취해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집행인은 빠른 손놀림으로 3회나 4회의 절개를 통해서 사형수의 목숨을 먼저 끊어놓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즉, 이는 고문의 성격도 아니었으며 종교적 의미의 고행도 아니었다. 사무적으로 진행되는 유교적 법률의 집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사형수의 신체를 해체하는 것은 유교적 관념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데 사후 세계에서의 영혼의 파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이번 독서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능지형에 대한 서국적인 시점을 유지해 왔던 셈이기도 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이러한 능지형의 실행이 청말 서구 세력의 접촉과 침범으로 불안해진 사회적 정황에서 기강 확립 등의 목적으로 그 선고의 횟수가 증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아니 할 수 없겠다. 

왕 웨이친이 종교적 엑스터시와 에로티시즘의 연속선에서 사디즘과 연관된 강렬한 쾌감을 경험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아마도 그런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능지형의 집행은 기독교적 수난극이나 의식화된 행사도 아니었으며 희생자의 세밀한 계획과 동의를 거치는 사도마조히즘적 퍼포먼스와도 그 궤를 달리했다. 형장에는 무대도, 이를 증언하고 기억해줄 관객으로서의 군중도 부재했다. 기독교적 ‘형벌미학’이 철저히 배제된 장소에 남아있는 것은 신속하고 사무적인 법의 집행, 법 그 자체의 실행이었다. 그의 육신은 교육의 장으로서 전시되었으며, 법의 준엄한 집행으로서 이는 완성되었고 동시에 해체되었다.

제국주의는 타자를 지배하는 인간의 본성이 집단적으로 드러난 전지구적 현상이며 식민지와 경제적, 문화적 세력권을 형성함으로써 거대 제국을 창출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의해서 수행되지만, ‘백인의 사명’이라는 기독교 전파를 통해 야만적인 저개발 국가에 유럽문명의 축복을 전해주는 것으로 그 맹목성을 합리화했다. 제국주의자들은 태생적으로 명령과 힘의 행사를 위한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사디스틱한 이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고통과 훈육에의 복종을 통해 특유의 야만성을 벗어나려 하고 이러한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일종의 마조히스트들을 그 존재의 조건으로 상정했다.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 사형수가 보이는 고통에 대한 순응과 그에 대한 도착적인 반응 및 이를 관망하고 즐기는 듯 보이는 중국 군중들의 야만스럽고 잔인한 민족성 등이 능지형의 사진 속에 알맞게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제국주의적 환상과 연상들이 한 껏 피어오르는 그 순간, 그 곳에는 현실적인 의미의 어떤 중국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왕 웨이친도 거기에는 없었다.

이 책은 능지처참이란 형벌에 대한 두 가지 판본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하나는 뚜렷한 절차와 적용 기준을 가지고 명청시대의 황제들이 사법행정의 일부로서 시행을 허락한, 세계 형벌학 속 혹형의 한 범주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객관적인 능지형의 역사이며 다른 하나는 서구인들의 오랜 상상속의 세계에서 한 차례도 그 생명력을 잃은 적이 없는 전설의 형벌, 공포와 불안, 매혹과 혐오가 뒤섞인 능지형에 대한 오해의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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