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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생
정길연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4월
평점 :
인생은 필연과 우연한 사건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진 시간이고, 또 이야기이다. 정길연 작가의 단편소설집 '우연한 생'에도 이처럼 각각의 단편들이 생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여성작가의 글이기 때문인지 7편의 단편의 화자는 거의 여성이다. 여성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겪는다. 그래서 공감이 가기도 하는 한편, 좀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감정표현들 역시 있었다.
첫 번째 단편인 '수상한 시간들'에서는 한 답답한 여자가 나온다. 남편도 아닌 그저 옛날 직장동료였던 남자의 죽음에 상주노릇을 하는 여자. 굉장히 우유부단하고 흘러가는 듯이 사는 여자다. 입버릇처럼 "난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 말이 자신의 영혼을 좀먹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버릇처럼 굳어진 것. 남편도 있고, 의붓딸도 있지만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런데 우연히 3일장을 치르는 장례식에서 다른 남자의 상주역할을 하는 여자와, 여자의 남편가 마주친다.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보통의 경우엔 경악하고 당황하고 변명하려 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상주노릇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도 처음엔 경악하고 당황하지만 이 상황에 달아나지 않고 통과할 것이라고 독백하면서 첫 번째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하는 오픈엔딩이다. 이 다음에 여자에게 무슨일이 일어났을까.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끝장내었을까. 아니면 하나의 헤프닝(으로 넘기기엔 가벼운일은 아니지만)처럼 넘기고 여자의 남편이 관용을 베풀었을까. 여자는 그저 '통과할 것이다'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다른 단편들도 하나의 사건이 위기-절정을 거쳐 확실한 결말보다는 오픈된 결말이 많았다. 짤막한 단편소설에 많은 의미를 응집할 수 있게 여운을 남기는 단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단편도 있었는데 이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우연한 생'이란 단편은 또 다른 느낌이다.
'우연한 생'에는 3명의 화자가 나온다. 과거 화려했던 연극배우 석혜련, 아파트 경비원, 젊은 아르바이트생 환희. 석혜련이 아파트에서 투신하면서 그 아래에 있던 경비원과 부딪쳐 둘 모두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일이 있기 전에 석혜련의 시선, 석혜련을 보는 경비의 시선, 이후에 사건을 접하는 환희의 시선이 혼재되면서 씁쓸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이 단편집은 달달하고 행복한 이야기보다는 씁쓸하고 뒤틀리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성화자의 시각으로 그런 부조리한 것들을 바라보는데 이런 뒤틀린 것들에 대한 완벽한 해소, 문제해결까지는 아니지만 그 억압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랄까, 조심스러운 기대를 남기고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책의 표지에 삶에 대해 '함정'이 곳곳에 파여진 그럼에도 걸어나가야하는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말이 이 책의 주제인 것 같다.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해주는 단편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