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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언덕
박희섭 지음 / 다차원북스 / 2015년 2월
평점 :

살아가면서 누구나 약간씩 비틀거리기도 하는 법이야. 지치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때도 있지 문제는 그럴 때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지 ~ 여태껏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아버지가 오랜 풍파를 겪고 난 거목처럼 튼실하게 여겨졌다. - p. 306
이 책은 화자인 문수와 문수의 가족이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원래 살던 동네가 아닌 아랫동네로 모든걸 다 버리고 야반도주를 하던 날부터 시작된다. 같은 사무실의 처녀인 여직원과의 만남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낀 문수의 아버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가족들을 이끌고 변두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허물어져가는 단칸방 집에서 마을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고, 공동수도의 물을 사용하기 위해 줄을 서서 물을 받으며 그 전과는 다른 삶속으로 들어간다.
신변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을 친 문수의 가족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나와 수중에 가진 것은 없었다. 별다른 기술도, 끈기도 없는 문수의 아버지는 하릴없는 백수가 되고 아들만 셋인 집에 문수의 엄마가 삭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계다 보니 집안의 장남인 문수의 형인 한수와 문수의 어린 동생 진수는 학교를 나가지만 차남이자 사춘기의 문수는 집을 지키며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하는 처지가 된다. 공부도 곧 잘하고 영특했던 문수지만 아직 성에 눈 뜨지못한 순진한 아이였으나 아랫마을로 이사온 후로 문수처럼 집안일을 하며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병태를 비롯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동네 분위기에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
문수네가 이사온 마을은 가진 것 없고 비밀도 없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는 우선 자신이 처한 상황에 신경을 쏟는 사람들 인 것이다. 문수네, 부뜰이네, 정반장, 장목수, 병태, 시구리왕, 선이네..모두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살이 인생들인 것이다.
문수의 아버지는 백수놀음을 하다 장목수를 따라 일을 다녔지만 장목수의 사고로 다시 백수가 되고 냉차장수, 목마꾼 등 장사를 하지만 이도 시원치는 않다. 아무것도 없지만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으로 사기꾼에게 속아 구치소도 다녀오게 되고 문수 어머니의 친정 도움으로 구치소를 나와 회사를 다니게 되고 선거운동을 하게 되면서 문수의 집에도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일이 잘 풀려 극장 지배인이 되고 축제의 날을 보내던 어느 날 문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고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화자는 현재의 삶에서 당시를 떠올린다.
그는 씁쓸한 감정에 사로잡혀 보리밭을 바라보았다. 오월의 햇볕이 내리쬐는 보리밭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자라난 보리가 마치 여인의 머릿결처럼 푸르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풍경속에 기쁨과 슬픔이, 설렘과 좌절이, 또 병태와 부뜰이와 선이누나, 그리고 첫사랑 은혜와 죽은 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에필로그 중에서 p.312
정작 나는 소설이 배경이 된 시절을 살아보지는 않았다. 예전 육남매 라는 티비 프로나 그 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드라마 속에서나 보아왔던 상황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보리밭에서 나눈다는 것은 정말 오래전 영화속 이야기만 같다. 보리밭은 사랑을 나누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성적인 사랑은 소설속에서는 보리밭 뒤의 담배건조장이고, 보리밭은 주인공 문수가 어른이 되어가는 곳이었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보리의 모습이 문수를 비롯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편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낙조와 뺨을 스치며 지나는 부드러운 바람결, 그리고 바람결에 따라서 여인네의 머릿결처럼 열을 지어 흔들리는 아직은 여물지 않은 푸른보리 이삭들, 그 모든 자연의 충경이 주는 고즈넉한 평화스러움이 마음을 순수한 희열에 젖게 했다. 어디선가 수천만의 푸른 이삭들이 내지르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함성이 귓결에 들려오는 듯 했다. -p.96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동네의 삶이 그래도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그 속에서도 정과 웃음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기회로 저자인 박희섭 작가의 출간작들을 찾아 보았다. 식민지시절을 배경으로 한 소설과 고려 말기의 소설, 등 시대적 배경을 잘 활용하시는 작가님답게 이 축제의 언덕은 나 자신이 살아보지 못했던 시대이고 잘 모르는 상황이지만 어느덧 빠져들게 되어 술술 읽게 되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