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는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존재를 날카롭게 묘파한 작가인데 ‘적지와 왕국’의 단편들은 확실한 지적보다 두루뭉술한 연대의 끝을 향해 배회하게 한다. 단편이다 보니 축약된 서술로 인해 그렇게 와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빠르게 읽히는 단편집은 아니었다. 카뮈는 인간의 실존과 본질을 탐구한 철학자로 세상의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반항했던 혁명가이기도 하다.적지와 왕국은 삶이라는 스토리보다 현실에 직면한 문제인 사는 일에 집중하게 한다. 적지와 왕국에서 힌트를 얻어 절망과 희망을 놓고 대조해 보면, 절망과 희망 사이의 애매모호한, 단순하게 해석하자면 보통이나 평범한 상태가 아닌,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일이 더 쉬워 보인다. 한 줄기 빛이 통과하는 틈새를 찾기 위해 밤을 배경 삼고 혼돈과 유대, 그리고 이를 집약시킬 예술을 등장시킨다.이 소설집에서 주목한 단편은 ‘말 없는 사람들’이다. “그 나이에 노장이라면 그럼 나는 벌써 송장이겠네” 얼핏 유머로 넘길 수도 있지만 고독이 묻어나는 문장이다.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는 나이란 고독한 법일까. “행복은 청춘과 더불어 지나가버렸다.” 포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그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들은 단편의 제목인 ‘말 없는 사람들’을 잘 반영한 것 같았다. 한겨울인데도 햇살이 눈 부시고, 햇빛의 싱싱한 흐름을 얼굴 위로 느끼는 일과 같이 이 단편에서는 반짝이고 따사로운 시선이 자주 등장한다. 차갑기만 한 세상에 놓여있지만, 희망을 찾으려 애쓰는 작은 온기가 전반적으로 흐르는 작품이었다.해소될 수 없는 답답함을 그리다가도 이면을 바라볼 여지를 남기는 단편들이 고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 같다. 지나친 관심에 시달렸던 시기에 파리는 카뮈에게 ‘적지’였을 거라는 역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우리가 유한한 삶을 살다 가야 하는 이 세계는 어디나 유형지요 사막이다. 그러나 그 적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왕국이기도 하다.”적지와 왕국이 동일시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란 그 안에서 구분되는 경계를 열심히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열정만이 심심치 않은 행복을 안겨주는 걸까.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