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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출간 15주년 기념 백일홍 에디션)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평점 :
날마다 나에게 가슴 울렁거리는 경탄과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깃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읽는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 p 22 돌이켜보니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 중에서
작년에 그 씨들을 받을 때는 씨가 생명의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시작이 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 짠하게 경이롭다.
- p 45 시작과 종말 중에서
흙길을 걷고 있으면 나무만큼은 아니라도 풀만큼도 못하더라도 그 생명력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힘이 비록 나에게 이르러 잎이나 꽃이 되어 피어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 풍진 세상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어찌 미소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 p 54 흙길 예찬 중에서
피정이 끝나는 마지막 날 점심시간 마침내 침묵의 계율이 풀렸다. 그동안 아무도 침묵을 갑갑해하거나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았건만 혀가 풀리자 식당 안은 마치 폭죽이 터진 것 같았다.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포옹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침묵이 터뜨린 폭죽이었다. 침묵이 피워낸 꽃이었다. 백화난만한 꽃밭. 침묵은 결코 우리를 가두지 않았건만 우리는 해방감을 느꼈다. 만약 갇혀 있었다면 결코 그런 해방감을 못 느꼈을 것이다. 침묵이란 지친 말, 헛된 말이 뉘우치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게 아닐까.
- p 92 그리운 침묵 중에서
상상력은 남에 대한 배려, 존중, 친절, 겸손 등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심성의 원천이다. 그리하여 좋은 상상력은 길바닥의 걸인도 함부로 능멸할 수 없게 한다.
- p 110 운수 안 좋은 날 중에서
나의 멈춰 섰던 시간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순간도 그리움이 되면 길어진다. 나의 일상의 쫓기는 시간들, 아무것도 안 할 때조차 숨 가쁘게 그러나 승산 없이 달려가는 나날에도 잠시 멈춰 서는 서늘한 여유를 도입해 보고 싶어진다.
- p 236 중신아비 중에서

<호미>는 2007년에 처음 출간되었던 작품입니다. 올해 다시 출간된 이 책은 생전 저자께서 사랑하던 꽃 백일홍의 이름을 따 출간 15주년을 기념하는 백일홍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책의 대부분을 일흔 이후에 쓰셨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마당이 있던 집 '아치울 노란 집'에서의 생활을 담았다고 합니다.
내용은 총 4개의 챕터로 나뉘어 글들이 실려있습니다.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그리운 침묵, 그가 나를 바라보았네, 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서울을 벗어난 작은 마당이 딸려있는 집,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깨달은 소소한 행복들, 꽃과 나무에 대한 사랑,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반추, 종교, 문인들과 지인들에 관한 술회, 그리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백가지가 넘는 마당의 식구들을 살뜰히도 보살피고 아끼는 저자의 마음 씀이 오롯이 애정으로 읽는 사람에게도 전해집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파괴되어가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도 묻어납니다. 어쩌다 지나가다 산을 깎고 공사 중인 곳들을 바라보노라면 저도 같은 마음이 되곤 해서 공감은 두 배가 됩니다.
상투 튼 진보셨던 할아버지 이야기나 시부모님 이야기, 친정어머니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모진 시대를 살아오셨지만 다들 사랑이 넘치셨던 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의 애틋함이 느껴집니다.
쭉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친숙한 누군가가 담담하게 자신의 지난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수다스럽게 일상의 자잘한 행복을, 때로는 조금은 쓴소리를, 때로는 애석함에 대한 푸념을 풀어내는 것도 같습니다.
책 내용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사람'에 관한 일화들입니다. 가까운 지인, 우인, 문인 등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글은 저자의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에 관한 에피소드들도 간간이 보입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저자가 큰딸을 얼마나 의지했는지 엿보이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어떻게 맞을지에 대한 바람은 읽고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숙고의 마음이 느껴졌거든요.
종종 나도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이를 먹고 늙어가면서는 마지막이란 것이 그저 멀찍이서 바라만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요.
다양한 내용들이 실려있지만 1편을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의 말에서처럼 자연을 통해 얻는 기쁨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깊이 와닿았거든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