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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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의 두 주인공 조지와 앤처럼 1968년 바너드 입학생이었던 저자 시그리드 누네즈는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동기에 대해, 너무도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시대였던 그때 이야기를 외부자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세월이 흘러 진짜로 나이를 많이 먹었을 때 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항상 안된다는 생각부터 해. 그게 항상 너의 가장 큰 문제였어, 조지." - p 29




지금은 그때보다 더 미친 소리로 들리지만, 나는 그때조차도 앤이 그 모든 걸 다 믿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진진하게 하는 말이라는 점에 대해선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진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위선이란 걸 몰랐다. 앤은 솔직하고, 정직하고, 스스로를 믿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그래서 나중에 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나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받는 걸 보며 충격에 빠졌다. - p 33




"과거에 존재했던 것에 대한 향수도 충분히 고통스럽지만 과거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한 향수는 그야말로 고문이다." - p 76




앤이 비판적인 사람이 되어갈수록 나는 상처받기 쉬운 존재가 되어갔다. 마치 껍질이 몇 겹씩 벗겨져 나가는 듯했다. 내가 앤을 실망시켰고, 그의 기준에 부합하자 못했으며, 더 이상 그에게 진지하거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 p 182




아 그래, 그땐 모든 게 달랐지. 그때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도 너그럽고 따듯하고 개방적이었지. ------- 우린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진짜로 믿었지. 전쟁도, 소유도, 굶주림도, 시기도, 탐욕도 없는 세상. - p 249




"그래, 하지만 그런 부류는 알지. 혁명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부잣집 응석받이들. 결국 전부 난장판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망쳐놓을 뿐이지. 흑인 남자들이 좋다고 난리 치는 부잣집 백인 여자애들, 가난한 흑인 남자와 함께 사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흑인이 되고 싶어 하는 애들. 만일 자기가 흑인이었다면 그 남자들이 거들떠도 안 볼 거라는 것도 모르고, 슬럼가를 추종하는 소녀팬들. 구역질 나." - p 329 ~330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판사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당신 부류의 마지막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 p 350 ~351




"조젯은 당신에게 딸을 대신할 수 없고, 당신은 조젯에게 그를 버린 아버지를 대신할 수 없어요." -p 497




무슨 일이 있었건, 나는 과거를 재창조하고 싶다. 오류라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겠지만 나는 이 글이 순수한 기억과 상상력의 합작품이 되기를 원한다. 결국 그것이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방법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 p 513




그가 하려는 일을 고려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연거푸 그의 면전에 던진 말은 이기적이라는 비난이었다. 그건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꼭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여자였는데, 그 누군가는 대개 자기 자신이었다. ------ 내가 보기에 그는 자신을 죽이고 있었고 내겐 그것이 최악의 이기심으로 여겨졌다. 도대체 뭘 증명하려는 거야? - p 575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중에서>






 



나는 오래된 책 냄새를 좋아하지만 갓 구워낸 빵 같은 새 책의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도 좋아한다는 것을 이 책을 받고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냄새는 내 손끝에서 함께했다.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는 1968년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조젯 조지'의 시선에서 그려진 소설이다.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는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장편 소설이다. 그중 5부는 3인칭 시점으로, 7부는 '고아 애니'에 대해 그녀의 동료가 썼던 글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을 다 읽는데 시간이 꽤 오래 소요되었다. 아마도 600페이지에 달한다고 해도 이처럼 오래 걸렸던 적은 처음인 듯싶다.




소설에는 미국의 6,70년대 배경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 시대의 미국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한 번쯤 찾아보면 좋겠다. 그 시대는 미국에서도 가장 격동의 시기였던 모양이다.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 히피족, 마약, 여성인권, 인종주의 등이 뜨거운 감자였던 시대.





이야기는 1968년 뉴욕의 바너드 대학 신입생 '조젯 조지'와 '둘리 앤 드레이턴'이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면서 시작된다. 화자인 조젯은 가난한 작은 마을에서 폭력이 일상인 집안에서 자랐다. 알코올중독자에 폭력적인 아버지는 죽고, 남은 엄마 또한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형제는 6명이었다. 소설 속에는 조젯의 여동생인 '솔랜지'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둘리는 부유한 부모를 둔 중산층 가정의 외동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부르주아적이라고 비난하며 싫어한다.


둘리는 둘리라는 이름 대신 자신의 중간 이름인 앤으로 불리기를 원하고 그렇게 불린다.




두 여자는 극과 극의 환경에서 자랐다. 앤은 자신과 자신의 집안이 가진 모든 것을 경멸했다. 자신의 신념이 완고했고 그 신념은 좀체 흔들리지 않으며 행동 또한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조젯은 그에 반해 굉장히 현실적이다. 이상주의에 가까운 앤과 현실주의에 가까운 조젯. 그리고 조젯의 여동생 솔랜지.



대학 시절 깊은 우정을 나눈 앤과 조젯이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도 하지만 그녀들의 삶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솔랜지 또한 어린 나이에 엄마의 학대에 못 이겨 가출한 후 히피들과 함께 어울리며 몇 년 동안 방랑자 생활을 하다가 조젯과 다시 만난다.




조젯은 두 번의 결혼을 했었고 두 명의 아이를 얻었다. 앤은 경찰관 총기 살인 사건으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두 사람은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병원에서 재회한다.




앤이 사랑했던 사람은 콰메 퀘시. 둘은 타 인종 연인이었다. 앤의 집안에서도 콰메의 집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사회에서 보는 눈 또한 곱지 않은 힘든 사랑이었다.



앤이 교도소에 수감되고 나서 조젯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상황은 다르지만 조젯 또한 앤처럼 인정받기 어려운 힘든 사랑을 하고 결국에는 헤어진다.






소설 속에는 그 시대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은 솔랜지가 열광했던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 우드스톡 페스티벌. 그리고 LSD. 프리섹스. 히치하이킹. 히피족들에 대한 것들이다. 그 혼돈스럽고 기이했던 미국의 6,70년대. 당시를 지나온 사람들은 공감할 내용들이 아닐까 싶다.




내가 느낀 것은, 어느 나라나 우울한 시대가 있었고 평등하지 못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도 예외일 수 없었고, 아동학대, 가정폭력, 강간 등이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그 시대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나라의 그 시대도 혼돈의 시대였던 것은 다르지 않다.




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면서 그녀가 가진, 그녀가 굳게 믿은 것들은 시대가 만들어낸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천성과 시대가 맞물려 완전한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행동이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 그렇다고 비난을 보내는 그 사람들을 실컷 욕해주기도 어렵다는 것.




인생 전반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온 앤.

그녀의 마음에 전혀 틈이 생기지 않았을까. 자신의 신념을 위해 했던 수많은 자신의 행동들이 단 한 번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을까. 어쩌면 틈 사이로 조금씩 새고 있던 것들도 온 힘을 다해 막고 또 막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을 짊어지고 온 신념이 무너지면 자신의 인생 전부가 무너지게 될 테니까 말이다.




격동의 시대를 뜨거운 우정으로 함께 한 두 여성이 극명하게 다른 삶을 걸으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끊어지지 않고 그 실이 얽혀진 삶을 살게 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길들을 돌아볼 수도 있다. 내 인생의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풍경들과 우정들과 사랑들을 떠올리면서 잊고 있던 누군가를 다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눈부셨거나 슬펐거나 행복했던 풍경들과 노랫소리를 다시 데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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