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함은 전체를 향해, 다시말해 존재자 전체의 존재를 향해 길을 떠남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철학 안에, 철학함 안에 들어서 있다. 인간은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길을 떠나 길 위에 있지않을 수 없는 자가 인간이다. 우리는 철학하고 있다. 우리가 철학에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우리는 항상 철학하고 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철학한다는 뜻이다. 철학은 세상과 담쌓은 소수의 지식인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으로 있는 한 철학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근본 조건이며 근본방식이다. 하이데거는 다시 신과 동물을 끌어들여 철학함의 고유한성격을 강조한다.
"동물은 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본질은 유한한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철학함을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철학 안에들어서 있다." "철학 입문 15쪽
『존재와 시간』이 발간되기 한참 전 프라이부르크대학 철학 강사시절부터 하이데거는 특별한 강의법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수강생들을 사로잡는 마법 같은 강의였다. 너무도 친숙하고 자명했던 것들이 말할 수 없이 낯설고 이상한 것이 되는 경험을 안겨주었기에 하이데거에게 처음 붙여진 별명은 ‘메스키르히의 작은 마법사‘였다. 알라딘의 조그만 요술 램프에서 거대한 요정이 불려나오듯이, 교탁이나 분필 같은 사소한 것에서 ‘존재자 전체의 존재‘ 같은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 불려나왔다. 하이데거의 강의는 엄격하면서도 격렬했다.
로고스의 날카로운 칼날이 사태를 헤집고 들어가다 보면 파토스의 피가끓는 심장에 닿았다. 마치 바위를 뚫어 찾아낸 수원에서 물이 솟구치는 것과 같았다. 파토스로 물들어가는 로고스, 로고스로 이루어진파토스라고 할 만한 것이 하이데거의 강의였다. 하이데거는 파도를헤치고 나아가는 선장처럼 강의를 이끌었다.
아르놀트 폰 부겐하겐(Armold von Buggenhagen)은 이렇게 기억했다. "존재론적 주제를 이야기할 때 하이데거의 모습은 교수의 이미지보다는 선장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거대한 함선조차 유빙으로 침몰할 위험이 있는 시대에선교에서 대양의 항해를 지휘하는 선장의 이미지."
강의실의 학생들은 하이데거의 말을 따라가며 차가운 두뇌가 어느 순간 뜨거운 걱정으로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가파른 로고스의 길을 따라 올라 드넓은평원의 풍경 앞에 설 때 차오르는 감격으로 끝나는 것이 하이데거의강의였다.
하이데거의 말은 환각제이자 각성제였다. 강의실의 수강자들을 혼몸 속에 몰아넣음과 동시에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게 했다. ‘명징한광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하이데거의 언어는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엄격한 사유와 들끓는 열정의 통일이었다.
말들의 먹구름이몰려와 구름 사이로 번개를 내리쳤고 천둥과 함께 무덤 속에 오래 잠들었던 철학의 미라가 깨어나 포효했다.
어떤 학생은 하이데거의 격렬한 강의를 듣다가 그 철학자가 혹시 ‘미쳐버린 아리스토텔레스‘가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삶의 모세혈관을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동시에 철학사 전체를 포괄하는 장대한 사유를 펼쳐내고, 한 편의 드라마를 상연하듯 격렬한 몸짓을 보이는가 하면 청중을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 한가운데로 몰아넣고, 아득히 먼 시대의 이야기에서메스를 끄집어내 오늘의 부박한 현실을 해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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