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윤리를 위해 투쟁하는 최고의 방법은 교육실천 속에서, 학생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가르치는 내용을 다루는 방법 속에서, 또한 저자들(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든 달리하는 사람이든 모두)을 인용하는 방식 속에서 이윤리를 실천하는것이다. 그들의 작품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해서는 안 된다.
매일매일 교실의 학습상황에서 생기는, 때로는 여러 가지로이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와 쟁점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을 둘러싼 교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식하는 일은 학생들에게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 학생들이 교사가 존경과 성실의 자세로 동료의 입장을 분석하고 비판할 수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 또한 중요하다.
윤리적 주체가 위반의 위험, 심지어 위반이라는 선택에 영원히 노출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윤리적 토대를 만들어갈 때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위선적 도덕주의에 빠지지않으면서도 보편적 인간 윤리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 윤리의 탈을 쓰고 있지만 명백히 독선에 빠진 도덕주의에 대한 지지를 위엄을 갖추어거부하는 일 또한 윤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아주 중요하다. 나는 이러한 윤리를 결코 왜곡하거나 부정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보편적 인간 윤리는 인간의 삶과 사회적 소통에 필수 불가결한 어떤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순진하고 관념적인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내 사상의 배경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동안, 즉 어떤 식으로든 계속되어야 할 그과정에서 교사는 ‘주체‘이고 배우는 나는 ‘객체‘ 라고 해보자 (다시말해 교사는 나를 형성하는 주체이고, 나는 그 교사에 의해 형성된 객체이다.). 이럴 때, 나는 ‘알고 있는 주체‘가 나에게 전달해준 엄청난 양의축적된 지식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역할에 만족하게 된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객체 인 나는 결국 그릇된 주체가 되어 더 많은 객체들을 재생산하게 될 것이다.
실천에 대한 비판적 반성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서 반드시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론은 공염불이 되고, 실천은 단순한행동주의로 전락한다.
따라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맨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이 똑같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면서 자신을 형성하거나 재형성하고 있으며, 배우는 사람 또한 배우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형성한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르침은 지식이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 두 주체는 서로가 명백히 다르긴 하지만, 객체라는 지위를 얻기 위해 교육을 받을 리는 없다.
문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르치다‘라는 동사는 관계타동사이다. 즉 직접목적어 (무엇을)와 간접목적어 (누구에게)가 필요한 동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누구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은 관계타동사 그 이상이다.
이것은 내가 견지해온 민주적 사고의 맥락에서 봐도 분명할 뿐아니라, 내가 인지적 과정을 이해하는 토대가 되는 형이상학적관점에서도 그러하다. 다시 말해 단지 가르친다는 것은 인류역사의 미완성이라는 맥락에서 불가능하다.
내용이기도 한 가르침과 가르침이기도 한 배움이라는 실천이요구하는 진정성을 지니고 살아갈 때, 우리는 동시에 지도적이고 정치적이고 관념적이고 영지적교육적이고 미화이고적이며 또한 윤리적인 총체적 경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경험 속에서 훌륭한 사람들, 품위 있는 사람들, 진지한 이들이손에 손을 잡고 원을 이룬다.
인식론적 호기심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은행저금식‘ 교육을비판하고 거부할 수 있다. 또한 학생과 교사의 창의성을 손상시키는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해도 학습자가 반드시 정체될 운명에 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받아온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바로 배움의 과정그자체를 통해, 학습자는 이러한 권위주의와 ‘은행저금식 체제‘의 인식론적 오류를 피해갈 수 있으며 극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배움의 과정이 지닌 창조적인 힘은 비교, 반복, 관찰, 불굴의 의심, 쉽게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 등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거짓된 가르침의 부정적인 결과를 극복한다.
조건 형성의 요인들을 능가하는 이러한 역량은 인간이 가진 분명한 장점 중 하나이다. 물론 이러한 역량을 부각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은행저금식 체제‘의 교육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문제제기‘를 본질적인 역할로 삼는 교육자, 즉 비판적 능력을 발휘하는교육자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하찮은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다.
독서를 무엇인가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보는사람에게 비판적 읽기란 불가능하다. 책 스무권을 읽었다고 으스대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스무 권씩이나 말이다!
독서는텍스트와 일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 관계 속에서 텍스트는나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 텍스트에 몰두하면서 그 텍스트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통해 주체가 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독서를 하는 동안 그 책이 마치 오로지 저자만의 생산물이라는듯, 그 텍스트가 지닌 내용의 포로가 되어선 안 된다. 이것은 올바르게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효과가 적은 읽기의 전형이다.
‘올바르게 생각하는 교사는 세계에 개입해 들어가 세계를 느낄 줄 아는 역사적 존재로서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존재방식이 지닌 아름다움을 학생들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역사적이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 또한 역사성을 가진다. 더불어 우리의 삶과 지식은 역사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새롭게 탄생한 지식은, 한때 새로웠으나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 언제라도 새로운지식의 출현에 기꺼이 물러나는 옛 지식을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열린 자세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현존하는 지식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
가르치고 배우고 연구하는 일에서 인식론적 과정의 두 가지중요한 요소를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식의생산을 연구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연구 없는 가르침도 가르침 없는 연구도 있을 수없다. 둘은 서로에게 숙주가 된다. 나는 가르치면서 계속 탐구하고 또 연구한다. 나는 탐구하고 질문하기 때문에, 그리고 질문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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