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심리학 또는 아비달마(abhidhamma)는 당신이 생각하는마음은 당신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이미 당신의 육체가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명상수련을 통하여 당신은 이 다양한 생각과 느낌들의 일어남과 가라앉음, 나타남과 사라짐을 관찰하게 되고 점차적으로 그런것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감각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때 당신은 더이상 정신적 고민에 의해서 사로잡히지 않는다.
더높은 수행을통하여 당신은 통찰과 지혜를 발전시키는데, 이것은 망상과 어리석음의 베일을 뚫고 들어가서 그 저변에 놓여있는 실재를 의식하는 힘이다.
누구든지 계(戒)를 잘 닦은자는 인간이나 천신(天神)의 행복한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평범한 세속적인 계율을 닦아서는 지옥, 아귀, 축생 같은 비참한 낮은 상태로 다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자신의 삶의 관점을 초세속적인 계(戒)를 닦기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데 두어야 한다. 누구든지 성실하게 그리고 진지한 자세로 노력하는 자에게는 성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있다.
만약에 누군가가 이와같이 더 높은 품성을 얻을 수 있는 좋은기회를 얻는데 실패하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조만간에 그 자신의 악업의 희생자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이 학업은 그를 지옥, 아귀, 축생의 비참한 존재의 낮은 상태로 떨어뜨리고, 여기서는 그의 수명이 수백, 수천, 수억년동안지속된다.
일반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끊임없이 어떤 생각, 사고, 상상, 사변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습성이 있다. 이렇게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어떤 대상을 선택해 그곳을 계속 주시하는 집중의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이 잘됨에 따라 산란한 마음은 점차 누그러지면서 선택된대상에 주시하게 된다. 이것이 집중이다. 이러한 집중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즉 일반적인 집중과 초세속적인 집중이다.
지혜에는 두가지가 있다. 즉, 세속적(世的)인 것과 초세속적(超世俗的)인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문학, 예술, 과학 또는세속적인 일에 대해 아는 것을 일종의 지혜라고 여긴다.
이러한 형태의 지혜는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와는 관계가없다. 이것은 올바른 지혜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파괴적인 무기들이 이러한 지혜를 통해서 고안되었으며, 이것들은항상 탐욕, 미움 그리고 다른 사악한 동기에 의해서 지배당하고있다.
세속적인 지혜의 참된정신은 인류에 도움을 주는 것이며, 어떠한 해(害)도 끼치지 않는데 있다.
명상에서의 세개의 부류의 지혜 -배움에 바탕을 둔 지혜 (suta-maya-Panna)-생각에 바탕을 둔 지혜 (cinta - maya-Panna)- 정신적 발달에 바탕을 둔 지혜 (bhavana-maya-Panna)
올바른 지혜를 닦았을때 계(戒)와 정(定) 또한 얻을 수 있다. 이 지혜를 닦는 방법은 몸에 존재하고 있는 두개의 요소인 물질과 마음의 진실한 형태를 알려는 목적을 가지고 관찰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이것은 진흙이나 밀가루로 만든 인형이 그재료들의모임에 불과한것과 같은 것이다. 물질은 대상에 대한 어떠한 앎의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
아비다르마는 형이상학과 심리학을 다루고 있는데, 정신과 물질의 요소에 대하여 의식이 있는 것과 의식이 없는 것으로 각각구분하고 있다. 정신의 요소는 내상을 생각하거나 대상을 아는기능이 있는 반면에 물질의 요소는 대상을 생각하지도 못하고대상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면 지금 대상을 아는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물질에 의존해서 나오는 정신의 요소이다. 이것은 마음이라고 불리며, 마음은 대상에 의지한다. 마음은 또한 ‘생각‘이나 ‘의식‘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마음은 물질에 의존해서 일어난다.
보는것에 관하여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보는것이 눈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보는것과 눈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보는것은 나다‘ ‘내가 사물을 본다‘ ‘눈과 보는것 그리고 나는 하나이며 같은 개체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눈은 하나의 사물이며 보는것은 또다른 것이다. 그리고 ‘나‘ ‘영혼‘같은 분리된 존재는 없다.
오로지 눈에 의존해서 ‘봄‘이 생기는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