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토지 개혁으로부터 인민공사화에 이르는 공산당의 정책이농촌 사회에서 가부장 권력을 완전히 해체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 예컨대 1950년대 초반의 토지개혁에서 지주로부터 몰수한 토지는 개인이 아니라 세대(戶)를 단위로 분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때문에 토지 소유 증서가 남성가장의 명의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토지 소유를 둘러싼 개인의 기회 평등이 관철되었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또한 인민공사나 생산대生産에서의 동일한 노동에 대해 남녀에 따라 차등적으로노동 점수가 매겨지는 등 ‘노동에 따라 분배한다‘는 방침에 어긋난성차별이 사회주의 체제 아래의 가부장적 경향을 조장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14) 더욱이 의식적 측면에서의 남녀 평등이 말처럼 순조롭게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 혼인이나 양육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전통의 부활‘(여아 유기, 매매혼,
부녀자 확대 등)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