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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5센티미터
신카이 마코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 <초속 5센티미터> 라는 제목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가에서 개봉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즐겨보던 영화 잡지 같은데서 이 애니메이션(이하 5cm/s)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에 대해 다룬 기사가 많았던거 같은데, 그만큼 나름 반향이 컸던 작품이었던것 같다. 심지어 대학 1학년때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한 과목에서는, 같은 감독의 다른 작품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라는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교수님의 열성적인 주재로 감상과 토론 수업(작품의 소재는, 평행우주.)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을 정도니, 감독 이름 만큼은 머리 속에 남아있게 됐다. 그 작품 '구름'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날으며 보게되는, 석양의 빛을 그렇게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애니 영상은 그 이후로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빛의 묘사가 일품이었다고 기억되는 작품이었다. 헌데, 이 감독의 대표작은 <초속 5센티미터>인 모양인데, 강의 과제와 토론으로 '구름'을 접한 뒤에는,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려서, 5cm/s에 대한 감상의 여유는 오늘날까지 미루고 있었다. 그랬는데, 나의 문화 후원자이신 '이케부쿠로 저녁 10시 방황녀♡'께서 필히 권하여 주신고로, 4,5년의 세월 뒤에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허나, 이번에는 애니가 아닌, 소설의 형식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초등학교 때 부터 어울려 다니던 소년과 소녀가 중학생이 되면서 서로 떨어지게 되고, 그 좋아하는 마음은 순애보적으로 고등학생을 거쳐 어른이 되고, 서른이 되는 15년 후에도 간직되지만, 그 둘의 관계는 행복하게 유지 되지 못하고, 아픔을 동반한 떠올림(기억, 추억)으로 자극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다룬 얼개는 십대를 거쳐, 이십 대 후반, 서른이 된 성인 남여의 공통된 인생 경험이 아닐까. 소설 5cm/s에서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1화에서, 그들이 떨어지게 되고 난 후 소년의 모습을 2화에서, 어른이 되고 '그 애'를 '그 또는 그녀'로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모습을 3화에서 보여준다. 백미는 1화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기 전에, 아카리(여 주인공)를 만나러 가는 타카기(남 주인공)의 하룻밤(어머나.?!)을 다룬 장면이다. 눈이 내리는 바람에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4시간이나 훌쩍 지난 뒤에야 약속 장소에 도착한 소년은. 늦은 밤 11시까지 기다려준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는 소년을 위한 도시락을 싸 왔고, 소년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린다. 석유 난로의 열기와 기다림 받은 시간이 섞인 따뜻하고 맛난 도시락. 소녀는 소년에게 편지로 얘기했던 벚나무아래에서 인생의 첫 키스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옆의 오두막에서 밤새도록... 그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게 둘의 마지막 순간이며, 15년 뒤까지도 가장 특별했던 일이 된다. 어른이 된 아카리와 타카기의 현재 모습은 그 둘이 주고 받을 수 있었던 편지의 다짐대로 현실화 된 면도 있고, 어긋나 버린 면도 있더라.
권말의 작가 후기에 보면, 2007년에 애니가 개봉하고 나서, 틈틈히 자기 영화를 소설화 해서 써 두었던것을 책으로 내었다고 한다. 그렇다는 말은, 영상에서 다 하지 못한 말을, 글로써 전하고자 했다는 말이라고 판단한 나는, 책을 다 읽고 영상을 보았다. 상호 보완적일 것이라는 작가(감독)의 말 처럼, 확실히 소설과 애니의 상호 보완이 어떤식으로 작용하는지 구경하는 경험이 되었다. 세상에 나오기는 애니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소설이 나온 격인데, 두 형식의 5cm/s를 다 본 지금의 나의 감상은, 애니가 소설을 보조한다라는 느낌이랄까. 감독이 영상을 만들면서, 표현의 한계를 느껴 아쉬워 했구나 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소설은 묘사의 부연이 많은 편이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이 애니보다 더 좋다고 생각한다. 더 섬세하고 상냥해서 좋달까.영상만으로는 그냥 아무 의미없이 지나치는 장면들이, 소설에서는 의미를 갖고 있게 되더라. 또 소설이 애니보다 재독할때 눈과 뇌가 재미있다. 왜, 영상은 눈으로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좇을 수 있어서 다시 봐도 새롭게 느껴지는 경우는 적지만, 글은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좇아도,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전혀 새로운 문장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은가. 위런 이유로, 해석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봤을때는, 소설쪽이 더 재미있다. 그래도 역시, 5cm/s는 소설과 애니 양 쪽을 순서가 상관없어도 좋으니, 둘다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초속 5센티미터>의 소설로 표현 할 수 없는, 영상만의 특혜는, 구름과 바람과 햇빛의 정교하고 섬세한 시각화라고 생각하므로, 또 우리가 잘 모를 일본의 일상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건 역시 애니 영상의 공로다.
소설과 애니의 스토리 상의 '의도한 다른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다. 애니에서는 어른이 된 타카기가 철도 건널목을 지나가다 우연히 지나가는 여인을 돌아보고 그 여인 또한 뒤 돌아 보는데, 그 순간에 기차가 두 대나 지나간다. 그 시간 뒤에 건너편에 여인이 계속 서 있나 싶었는데, 제 갈 길 가고 없더라. 허나, 소설에서는 두 남녀의 눈이 일순간 마주쳐 버린다. '마음과 기억이 격렬하게 술렁 댄 순간'에 기차가 지나가 버리지만, 두 사람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것 같고, 말이라도 나눠볼 여지가 있는 듯 하게 묘사 되었다. (그런데 아카리는 이미 기혼 여성이 되 버린 듯 하다.) 소설과 애니가 두 사람의 함께 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을 잔인하게도 상호 보완한다. (그 철도 건널목 씬뒤에 두 사람의 감격적 재회가 있었더라면, 아침과 저녁의 불륜 드라마가 되어버렸을게다. 현실은 그런거니까. 그런건 아름답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면을 기점으로 뭘 더 어찌 해 볼 수 없는 감정은 최고조에 오르고, 작품의 이야기는 끝난것 같다. 그 이후는 아름답지 못하다니까 그러네.)
<초속 5센티미터>. 그 명칭을 처음 들었을때는, 물리학적인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예고편이나 스틸컷은 한 장면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가 5cm/s든 설마 서정적인 속도겠어'하고 굳어진 첫인상은 독서 후, 반전했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게 뭐 어쨋다는거냐구 하며 읽었고, 의미를 잘 파악 못 했는데, '꺄아 로맨틱해'라고 말하는 한 여성 동지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초속 5센티미터는 부드러움을 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비가 내리는 속도가 초속 5미터라는데, 비에 맞는거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운 속도다. 게다가 꽃잎이 내게 초속 5센티미터로 부딪혔어 라고 하면 간지러운 느낌마저 든다. 이카리와 타카키는 소년 소녀 시절에 위러한 세상의 단편적인 지식을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매년 벚꽃을 보면서 이 생각이 나면, 그리운 감각이 초속 5센티미터로 간질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초속 5센티미터는 부드럽고 그리운 감정의 속도다.
아카리는 타카기와 떨어지기 전에, 내년 봄의 벚꽃도 너랑 함께 보고 싶어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 둘이 그 뒤로 같이 벚꽃을 본 날은, 15년 동안이나 오지 않았다. 둘이 첫 키스를 한 그날 밤은 눈이 오는 밤이었고, 그 뒤로 그 둘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의해, 연락이 끊기게 된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15년의 세월 뒤에 철도 건널목 씬에서 조우한(것 같은) 장면은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함께 벚꽃을 본 시절과 다시 한번, 함께 벚꽃을 보는 시간 사이에는, 눈 뿐이었던거네. 이 생각을 하니, 다시금 그간 세월 만큼의 아픔이 전해져 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도쿄는 참 쓸쓸한 도시인거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더 그럴 것 같다. 타카기의 행적의 우울함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만 밀어내는 현대 남성의 모습같았다. 오죽 <도쿄 블루스>라는 여성 입장에서의 고독을 노래한 곡이 있지마는, 그 곡에 등장하는 남성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쓸쓸한 도시 도쿄. (혼자 갈꺼면 거기로 여행은, 가지 말아버릴까))
사실 이 책을 중간 중간 덮으면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작품은 개인의 심연 깊숙히 가라앉힌 기억을 흔들어서, 수면위로 부상하게 만드는 요소가 다분하기에, 가라앉히고 읽고, 진정 시키고 읽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옛 기억을 간질이는 작품은 피하게 되더라. 무의식적으로든 육감으로든 알아차릴 수 있달까. 10년 가까운 세월이 감정의 기복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긴 했어도, 지금도 그 기억은 여전히 가슴을 아프게 한다. 왜 여자들은, 결혼 해 버리는 걸까.
중간 중간 자연스러운 흐름을 깨는 매끈하지 못한 단어 연결이나, 오타로 인해 몰입이 방해 되었다. 퍼뜩 퍼뜩 현실 감각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라는 역자의 배려이리라.
두근 거리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감정을 다시금 느끼고 싶을 때는 이 책을 다시 읽어 보려고 한다. 그 때는 눈이 내리는 겨울이나, 벚꽃이 날리는 봄에 평균 시속 150키로미터의 열차안에서, 초속 5센티미터를 손에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