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완독 94] 온 트레일스. 로버트 무어. 와이즈베리.


헉슬리 "자연은 '항상' 이질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때때로 극악무도하다." (52)

걷기를 좋아한다. 모든 인간이 그렇겠지만 걷기는 본능이고 즐겁기까지 하다.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20대에는 이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제주 올레길을 걸었고, 차마고도 트레킹을 했고, 몽골 트레킹을 해봤다. 그리고 요즘은 종종 뛰어다닌다. 제주도, 영남 알프스, 춘천, 가평, 고창 등 지인들과 국내 여기저기를 뛰어다녔고, 오키나와와 오사카에는 풀마라톤 대회에 다녀왔다. 걷는 것은 대체 내게 혹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도 걷고 뛰어다닐까? 이런 두꺼운 책도 나오고.

이런 호기심으로 첫 장을 펼친 온트레일스. 자연과 걷기에 대한 인류의 호기심이 한 권에 녹아있다. 단순히 산길 걷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두께에 당황했지만 생각보다 즐겁게 읽힌다. '트와일라잇', '헝거 게임', '비하인드 허 아이즈', '린인' 등 해외 베스트셀러를 잘 골라내어 수입해오는 미래엔 출판사의 강점이 돋보인다. 이번엔 소설은 아니지만 인기를 끌던 소설들만큼 흥미진진하다.

저자 로버트 무어는 5개월간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하이킹을 경험하고, 길 위를 걷는 방랑자로서의 경험과 길의 의미를 과학, 역사, 철학, 고고학, 지리학 등 다양한 맥락에서 심도 있게 풀어냈다. (책 소개 참고)

트레일에 대한 작가의 연구와 생각의 흐름이 총 6장으로 나뉘어 있다. 책을 쓰게 된 호기심과 이유 1장 '길의 기원을 찾아서', 동식물, 곤충 등 생물의 트레일을 인간의 그것과 동급으로 놓고 연구하는 2장 '맛, 냄새, 그리고 집단지성의 길'과, 3장 '길들여지는 동물, 가축, 야생동물에게서 배운 것들', 원주민과 트레일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는 4장 '인생과 역사와 이야기가 얽히는 길', 트레킹과 하이킹, 현재를 이야기하는 5장 '걷는 자들을 위한 길', 애팔래치아 트레일 이야기가 담겨있는 6장 '길이 다시 야생 숲이 될 때'로 구성되어 있다. 6장을 쓰기 위해 길고 긴 서론 5장을 '구색 맞추듯' 채워 넣은 것 처럼 6장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생동감이 강렬하다.

개미나 코끼리 등 곤충과 식물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인류의 변화를 추측하는 '무한한 자연 속의 삶(트레일)'을 이야기한다. 양치기와 양 떼들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인간'만'이 어떠한 것들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드러내려는 게 아니라, 단지 지구에 살고 있는 여러 생물 중에 하나, 그들과 함께 사는 인간의 삶, 트레일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아마도 이런 부분이 '걷는 인간을 위한 21세기의 월든'이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제 생각엔 인간이 가장 분명한 트레일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 만 년 후 언젠가 어떤 생물이 여기 다시 와서 이 콘크리트 다리의 잔해를 보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모든 동물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트레일을 남기는 셈 아닐까요." (224)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코스모스를 읽었고 총 균 쇠를 읽고 있다. 온트레일스를 읽으면서 총 균 쇠를 읽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는데, 3장에 총 균 쇠를 인용한 부분이 나온다. 범우주적인 시각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트레일'이라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연구 방향을 찾아 생각하고 글을 쓴 로버트 무어. 한 가지 관심사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와 탐구를 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집념이 돋보인다. 이런 책은 진득하니 오랜 시간을 두고 틈날 때마다 야금야금 읽어야 재미가 있는데 해야 할 일(!)이 많아 급하게 읽어 책의 깊이를 덜 즐긴 것 같다 아쉽다. 몸에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과식해서 체한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좀 산만하기도 하다. 총 6장으로 구분 지어 정리하고 있지만 각 장의 연관성, 개연성이 있나 싶은 부분들이 있다. 한 장 안에서도 앞뒤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다. 번역체에서 오는 불편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열정만은 강렬하게 느껴진다.
부럽고 신기하고 재미있고 지독한
로버트 무어의 길, 트레일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 온트레일스.
이런 책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신기하게도, 연구자들은 각각의 개인이 황소의 무게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집단지성이 뛰어나게 발휘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더 많은 영향을 주고받을수록 그 집단이 현명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낮아진다. (128)

"눈은 많을수록 좋다."
동물들 한 무리에 눈이 많을수록 포식자를 미리 감지하거나 새로운 먹이를 발견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 이 가설을 주장하는 바다. (138)

코끼리 발이야말로 이들이 어떻게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정글이나 사막을 통과하는 가장 쉬운 경로를 찾아내는지 알려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51)

역사상 코끼리들은 수없이 많이 길들여졌지만 결코 사육되지는 않았다. 한니발 장군의 전쟁 야수에서부터 바넘 서커스의 발레리나에 이르기까지, 훈련된 코끼리들은 거의 모두 야생동물로 태어나 동물 조련사들의 표현대로 "길들여졌다." 이것이 길들여진 동물과 사육되는 동물을 구분할 수 있는 차이다. (...) 우리는 우리 세계에 적응하도록 그 동물들의 유전자까지 바꾸어 놓았다. (159)

양치기를 하면서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양치기는 양들의 의지를 꺾기 보다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려고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모로니 스미스는 숙련된 양치기의 목표는 양들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양치기가 원하는 것을 양들도 원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적었다. 또한 이것이 곧 "모든 동물에게 적용되는 성공적인 동물 다루기 비법"이라고 덧붙였다. (184)

어렸을 적 나는 땅이 근본적으로 안정적이고 고요하며 미묘하고 거의 신성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곳인데, 인간이 그 균형을 깨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레일을 더 자세히 연구할수록 이런 환상은 점차 증발해 사라졌다. 이제 나는 땅을 크고 작은 수많은 조각가들의 합동 작품으로 본다. 양, 코끼리, 개미, 그리고 우리 인간은 각각 세계를 돌아다님으로써 세계를 바꾼다. 우리는 벌집이나 둥지, 진흙 움막 또는 콘트리크 빌딩 등을 지음으로써 지구의 윤곽을 조각한다. 먹음으로써 살아있는 것을 쓰레기로 바꾼다. 걸음으로써 트레일을 만든다.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지구의 모습을 바꿔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다. (185)

삶이란 세상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다. 지식은 힘들게 얻어진다. 말과 글은 모두 지식을 고정시켜 전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구전 문화권과 문자를 발달시킨 문화권이 분명하게 둘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트레일 신호들이 보여주듯이 나뭇가지, 돌무더기, 그림, 지도 등 이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엄청나게 다양한 매체들이 존재한다. 모든 신호 체계 중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용해력이 큰 것은 아마도 문자, 심지어 말보다도 앞선 최초의 기호인 트레일 그 자체일 것이다. (268)

야생성의 의미는 황무지의 의미에서 피신처의 의미로 변화했다. (359)

"도로가 지나가는 곳은 시대를 불문하고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톰 매그너슨. (366)

염소 목의 팽팽한 힘줄, 좁은 나뭇가지들 위에서 작은 발굽들을 불안하게 딛고 있는 모습에 익숙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갑자기 그 염소에게 깊은 동류의식을 느꼈다. 염소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치는 우리, 항상 쉼 없이 들썩이는 모든 생물과의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임을 느꼈다.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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