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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에게 하늘 나라를 묻다 - 예수님의 비유에서 삶의 답을 찾다
전원 지음 / 생활성서사 / 2020년 6월
평점 :
2년 전, ‘성서 주간’을 맞이하면서, 복음을 조금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복음을 읽고 묵상한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매일 복음 묵상 글을 쓰시는 것처럼, 해보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2년이 다 돼가고 있습니다.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는, 매일 쓰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무슨 내용을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날에는,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쓰다 보니, 이제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글을 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시간은, 온전히 하느님과 만나고 대화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됩니다.
마음에 새긴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지만,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겨자씨에게 하늘 나라를 묻다>는 복음 묵상을 조금 더 깊이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의 얕은 묵상을 부끄럽게 느끼기도 했고, 큰 깨달음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삼기도 했습니다.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다시 한번 가슴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든 내용을 다 열거하기는 어렵고, 그중 몇 가지만 의미를 되새겨봤습니다.
#1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 원수가 있습니다.
가라지를 덜어낼지 종들이 묻자, 주인은 그냥 두라고 합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수확 때가 되면 일꾼들에게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고 합니다. (마태 13,24-30 참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아니, 용서하기 힘든 사람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보고 말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야 하고, 그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마음과 해야 하는 마음에 갈등이 생기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한편으로는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마저 들기도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노력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간다는 것은 밀밭의 가라지를 뽑아내듯 그야말로 흠도 티도 없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그림자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화해 하느님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전인성(wholeness)을 회복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p45》
후반부에 가서, 이 복음에 대한 다른 묵상 내용이 나옵니다.
《가라지를 일찌감치 뽑아버리지 않고 마지막 추수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밀과 가라지의 구분이 어려운 ‘모호성(ambiguity)’과 밀과 엮여 있는 ‘관계성(connectedness)’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악과의 ‘분리’가 아닌 ‘공존’을 말씀하십니다. p165》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로 인해, 세상에 악(惡)이 존재하고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미리 막으실 수 있으실 텐데, 왜 그런 것까지 허락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인 진실인지 깨닫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판단하는 것을 자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악과의 공존을 통해,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주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2
일상에서의 깨달음을 이야기할 때, 원효대사의 유명한 일화를 자주 언급합니다.
유학을 떠난 원효대사는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오는데 머물 곳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때 동굴을 발견하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심한 갈증으로 잠에서 깨어났는데, 바가지에 물이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고 단숨에 마셔버립니다. 날이 밝아 눈을 떴는데, 동굴인지 알았던 곳은 무너진 무덤이었습니다. 바가지인 줄 알았던 것은, 해골이었습니다. 원효대사는 역한 느낌이 들어 바로 구토를 합니다. 그 순간 원효대사는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알지 못했을 때는 맛있게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역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학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멀리서 찾으려고 하는 이상(理想)은, 가까이에 있거나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저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느꼈던 행복이, 우리가 일상(日常)에서 마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 신학자 카를 라너는 단조롭게만 여겨지는 우리 삶의 일상은 하느님의 은혜가 숨어 있는 곳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걷고 일하며 살아가는 일상은 영원한 ‘불가사의’와 ‘무언의 신비’를 담고 있는 곳으로 ‘실재’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허둥대며 바쁘게 반복되는 일상이 생의 에너지를 소모해 가는 무의미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가 깊게 숨겨져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p63》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참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3
냉담자가 성당에 다시 나오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죄가 커서 성당에 못 나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들려주면 좋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카렐 차페크의 소설 <최후의 심판>입니다.
무차별하게 사람을 죽인 ‘쿠글러’라는 사람이 죽게 되어 하늘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습니다.
재판관들은 지상에서 재판관으로 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범죄자의 죄를 밝혀 줄 증인으로 신(神)을 소환합니다. 재판관들은 살인자에게 종신 지옥형을 선고합니다. 범죄자는 신에게, 왜 당신이 심판하지 않고 인간이 심판하게 하냐고 따져 묻습니다. 신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심판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기도, 그 사람의 모든 사정을 알면 이해가 되고, 가슴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심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설령 인간은 인간을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하실 수 없으십니다. p118》
하느님 앞에서 당당할 수는 없지만,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해도 하느님 앞에 나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나약함에 가슴 아파하십니다. 더 가슴 아프지 않으시게 어떤 경우라도 하느님 앞에 나가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2년 정도 복음 묵상을 하면서 신기하다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같은 복음을 읽더라도, 묵상하는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복음이라도, 꾸준히 묵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 내용은 같을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성숙해지고,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노력을 봉헌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