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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4년 5월
평점 :
7월에 읽은 첫 번째 책은 <트릭>이라는 이탈리아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도메니코 스타르노네'가 저술한 장편 소설이다. 소설은 크게 1장, 2장,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백 쪽에 달하는 책이지만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작가의 글맛이 좋아서 금방 읽혔다. 일 년에 책 세 권을 겨우 읽는 동생도 재미있다며 가져다 읽었다.
이 책은 크게 보면 일흔 살의 할아버지와 네 살의 손자의 특별한 성장기이다.
딸의 부탁으로 얼떨결에 네 살짜리 손자를 떠맡게 된 일흔 살의 주인공(다니엘레)은 시종일관 아이(마리오)를 귀찮게 여긴다. 나 역시 아이보다는 어른에 가까운 상태여서 그런지 초반에는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돼서 덩달아 마리오가 귀찮게 느껴졌다. 최근까지 학교 과제 마감에 촉각을 곤두세웠기에, 마감까지 삽화를 그려야하는 주인공의 심정이 너무나도 이해가 됐다. 그런 와중에 옆에는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계가 전혀 다른 네 살짜리 아이가 쫑알거린다면 얼마나 정신이 없을까 공감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새 마리오에게 무장해제를 해버리고 말았다. 네 살 어린이 특유의 지치지 않는 산만함(?)과 호기심, 그리고 그런 아이를 끊임없이 밀어내는 철옹성 같은 다니엘레로 인해 마리오에게 괜시리 짠한 감정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뚫어내려는 창과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맞지 않는 퍼즐 같으면서도 어떻게든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기묘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밀어내고 귀찮아하는데 마리오는 할아버지를 너무 좋아해서 밀어내도 다시 와서 놀아달라고 졸랐다. 마리오의 이런 타격감 제로인 성격은 마침내 다니엘레의 마음까지 건드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별 볼일 없는 존재라 여겼던 어린 아이가 다니엘레가 지난 세월동안 외면했던 무언가를 마주할 수 있게 한 열쇠가 된다.
오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삽화가'라는 직업을 위해 살았던 주인공은 마감에 대한 압박과 성취감을 넘나들며 살았지만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져 비슷한 그림만 그리며 쇠퇴해가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스스로를 '할아버지'라 정의하지 않으려 하고, 늙고 쇠퇴해가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주인공은 '생기 가득한' 그림을 그려내는 손자에게 열등감과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삽화가'라는 이름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게 될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어가지만 그걸 안다는 것과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인 듯하다. 주인공만큼 긴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나 역시 벌써 이십대의 절반을 보내고 나머지 절반을 바라보며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몇 살이 돼야 나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명확히 짚을 수 있을까? 마냥 어리지도,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칭할만큼 완전하지도 않은 애매한 지금, 휩쓸리는 물살 속에서 무언가를 붙잡아보려 애쓰고 있다. 아직도 부족한 게 많고 배울 게 많은 애송이처럼 느껴지는데 시간이 흘러 '진짜 어른'이 된다면 다르게 느낄 수 있을까. 확신없는 의문이 든다.
앞만보고 달리며 오로지 삽화 그리기에만 몰두했던 주인공은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이제는 '미래'라고 부를만한 시간보다 돌아볼 '과거'가 더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지난 시간동안 성공을 위해 몰두하느라 애써 외면했던 상처와 그로인해 자라지 못한 채 '유령'처럼 남아있는 또 다른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작품 속 주인공은 흔히 떠올리는 '현자같은' 할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른다. 주인공은 일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느낀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불안하고 우울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사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일흔이 됐지만 여전히 불완전하고, 네 살의 어린 손자에게도 미움과 열등감을 느끼는 주인공을 보며 어쩌면 이런 모습이 (원치는 않지만) 나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썩 멋있지는 않는 일흔의 모습이지만 한 발 들어가서 보면 누구에게나 있는, 저물고 싶지 않아서 악을 쓰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역설적으로는 주인공이 그토록 원했던, 자신에게는 더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이라 여겼던 '생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네 살짜리 손자의 재능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주인공의 내면에 예술에 대한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다는 반증이니까.
주인공은 찬란했던 지난 날들을 아쉬워하면서도 괴로워했다. '광분'이 가득했던 비좁고 빈곤했던 지역에서 그의 유년시절은 분노와 가난으로 얼룩졌다. 그에게 나폴리의 집과 유년시절은 썩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 시절 그가 외면했던 상처들은 그를 평생 따라다니는 유령처럼 괴로운 기억으로 남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손자가 생긴 나이가 됐고, 오랜만에 방문한 옛집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들과 마주하게 됐다. 손자의 예상치 못한 장난으로 인해 발코니에 갇히게 된 그는 인생에 대해 깊이 고찰하게 된다. 지난 날의 자신을 돌아보니, 그는 평생 '결실'을 봐야한다는 생각에 강박감을 가졌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간 충만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이 어쩌면 텅 빈 공허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가 쫓았던 목표들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훗날 과거를 무엇이라 부르게 될까. 아직 싹조차 틔우지 못한 존재이지만 언젠가는 내 삶도 마리오보다 다니엘레에 가까워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나의 과거를 어떻게 떠올리게 될지 궁금하다. 혹여나 내 삶이 권태로움에 젖어 생기를 잃게 된다면 그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며 꺼내볼 수 있기를. 차가운 발코니에 갇혀 인생을 고찰했던 주인공을 떠올리며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대단함과 하찮음의 차이를 스스로 정의내릴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