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아 : 내일의 바람 사계절 1318 문고 120
이토 미쿠 지음, 고향옥 옮김, 시시도 기요타카 사진 / 사계절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동일본대지진 후 24년, 다시 닥쳐 온 재앙의 물결 앞에

살아남기 위해, 살려 내기 위해 몸부림친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 기록

(216p.) 지진이 일어나기 전, 나는 석 달 동안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살았다. 방에 틀어박힌 채 모든 것을 차단했다. 마음이 편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나 스스로 내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억누를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언젠가, 어쩌면 다음 순간에 저질러 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두려웠다. 두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면 누군가를 상처 줄 일도 나 자신이 상처 입을 일고 없다.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두려웠다.

책의 후반에 중학교 2학년 이치야의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으로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린 이치야. 순수한 아이의 마음에 깃든 상처는 이렇듯 모든 걸 차단하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자기 보호본능이자 타인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마음임을 알기에 책에서 이치야를 대하기엔 마음이 참 아팠다.

"엄마 연어 주먹밥이 제일 좋아!" _ 7p.

그런 이치야를 묵묵히 옆에서 지켜보고 달래보기도 하고, 때로는 으름장도 놓아보지만 그래도 이치야가 제일 좋아하는 연어 주먹밥을 문 앞에 놔두며 "꼭 먹어~" 라던 엄마 '시호'

이치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시호에겐 든든한 친오빠 '겐스케'가 있다.

이치야에겐 아빠같은 존재인 겐스케가 있었기에 시호도 이치야도 안정된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2 이치야는 그런 겐스케조차도 점점 피하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사춘기 청소년을 둔 가정의 모습이랄까.. 분명 마음은 아닌데 거리두기가 시작된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날은 담임교사와 상담을 위해 직장에서 일찍 조퇴하고 시호는 집에 있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돌보고, 과제만으로도 3학년으로 진급이 가능하다는 담임교사와 상담하며 아들 이치야를 돕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싶었지만, 거부하는 아들을 더이상 달래지 못해 문 앞에 주먹받을 두고 내려온 시호. 담임과의 면담에 가기 위해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덜컹덜컹, 콰르르르릉...

지진이었다. 모든 것이 깨지고 가라앉고 무너지고.

이치야는 순간 엄마가 걱정되서 깨진 가구들 사이로 계단을 내려왔다.

콩콩콩...

엄마?

콩콩콩...

분명 엄마의 구조신호였다. 이치야의 힘만으론 도저히 치울 없는 더미 속에 분명 엄마가 있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나타났다. 엄마가 저 아래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쓰나미 경보에 결국 남자는 이치야만 데리고 대피한다.

"나 도망쳤어. 엄마를 두고 왔어. 내가 죽였어." - 180p.

이치야는 간신히 목숨을 구한 사람들과 한 건물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겨우 삼촌인 겐스케를 만난다. 그리고 목놓아 운다. 엄마의 구조 신호를 듣고도 그냥 왔다며.. 당시 자신을 구해준 그 남자, 가타기리를 원망하며...

"살려고 한 거야. 넌 살려고 했던 거라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 180~181p.

동생 시호의 생존여부가 희미해진 상황에서 마음이 아팠지만 겐스케는 조카라도 살아온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들의 마음이 타 들어가는 것만큼, 생존자를 찾으려는 또 다른 생존자들의 마음도 같다. 부족한 식량을 아껴먹으며 구조를 기다리려는 의지가 어느 순간 개인의 욕망에 사로잡혀 타인을 생각치 않고 모두 먹어버리는 사건도 생기고, 한편으론 더 어려움이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도 보인다.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다. 생존을 위한 저마다의 방식이었다.

엄마를 구하게 내버려두지 않은 가타기리 아저씨를 끊없이 원망했지만, 엄마를 잃고 자책하고 상처받은 것만으로 삶을 가만히 두지 않았던 이치야는 어느 새 성장해있었다. 어쩌면 방에 틀어박힌 채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과 단절하려 했던 그 때보다 훨씬 더 살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이치야의 모습은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힘찬 생명의 에너지를 주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구해 줘서, 고맙습니다.

알고 있었어요. 진작에. 그때 아저씨가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나는 죽었을 거라는 거. 엄마가 그것을 바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어요. 아저씨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나 자신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나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거예요.

나는 약하고 비겁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치야는 얼굴을 들고 가타기리를 보았다.

"살아갈게요. 저도, 여기서, 지금부터." - 220~221p.

얼마 전 4.16 추모 문화제가 있었다. 세월호 탑승 피해자들 중에는 생존자도 있고, 희생자도 있다. 그 긴 세월동안 생존자들은 어쩌면 이치야와 같은 마음의 아픔을 갖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여전히 그 아픔이 계속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왜 나는 살아있고, 그들은 희생되었을까.. 눈 앞에서 사라져 간 이들이 뇌리에 박혀서 어쩌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겪어보지 않은 이는 절대 알 수 없는 아픔이다. 그러기에 그만 잊으라는 말은 얼마나 무례한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치야가 그 아픔의 과정을 딛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재난과 사고의 생존자들이 살아내겠다는 힘을 얻도록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은 묵묵히 응원하고,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다만 나는 살아있다. 그래서 살아가야 한다. 똑바로,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여기서, 바로 지금부터!'

"엄마를 두고 왔어. 내가 죽였어."
"아냐! 이 바보야, 그게 아니잖아! 살려고 한거야. 넌 살려고 했던 거라고." - P180

"..... 고맙습니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 P220

"살아갈게요. 저도. 여기서, 지금부터."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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