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잘 가라 슬픔이여

어서 오라 슬픔이여

- 폴 엘뤼아르 <눈앞의 삶> 중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은 자신의 첫 자전소설의 제목을 폴 엘뤼아르의 시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프랑스어로 "Bonjour Tristesse"는 맞이하는 의미의 '슬픔이여 안녕'이라지만 어쩐지 헤어짐의 안녕도 있는 것 같다. 세실은 그런 아이인 것 같다.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 p.186 중에서

철없던 17살이었고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서 아버지를 사랑했던 안이 교통사고인지, 아니면 자살인지 모를 이유로 죽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도록 슬픔이라는 감정을 내 보인 적 없는 세실에게 안의 죽음은 어찌보면 처음 맞이하는 진정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세실이라면 이런 낯선 감정을 멀리하고 예전으로 돌아가고자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아버지를 잃을까 안을 떼어놓기 위한 작전을 세우듯이 말이다. 원래 정해져 있던 것처럼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왔으니, 이제는 슬픔을 보내야 한다.

58년에 발간되어 이 책이 이렇게 사랑받는데는 이러한 이중성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세실은 17살 소녀의 순수함과 함께 담배와 술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성욕에 있어서 사랑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아버지와 안의 관계에는 매우 냉소적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있어서도 안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을 때, 시릴에 대한 감정을 사랑으로 포장하였지만, 안이 죽고나서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단지 욕구를 풀어주는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매우 이성적이고 지적이게 등장하는 안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어쩌면 안은 세실의 어머니가 죽고나서부터 계속 세실의 아버지 레몽을 사랑해 왔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을 뿐. 겉으로 강해 보이던 그녀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쉽게 무너진다.

이중적이라는 것이 나쁜 의미처럼 여겨지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속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가진상반되는 이미지들을 만나게 되면서 오히려 나는 더 각각의 캐릭터에 공감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매순간 선택의 길위에 서 있는 인물을 볼 때, 이 책속에는 진정한 악마가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은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 이후에 새로운 형태의 성장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고, <롤리타> 이후의 최고의 10대 관능미를 본 느낌이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사강은 '나를 파괴함으로써 나를 만들었다'를 증명해 보인 인물이었다. 이 소설은 그 시작이었다. 그 여름 휴가지에서 보낸 몇달로 세실은 술과 담배, 첫경험, 거짓까지 저지르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모습 중의 하나인 '슬픔'을 만났으니 말이다. 이 아픈 성장을 평생 안고 살아갔을 그녀가 왠지 슬프다. 이렇게 나는 슬픈 사강을 만났다.


나는 그냥 나야. 그러니 사태를 내 마음대로 느낄 자유가 있는 게 아닐까? 평생 처음으로 ‘자아‘가 분열되는 듯했다. 나는 이런 이중적인 면을 발견하고 몹시 놀랐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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