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ㅣ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평점 :
이 책을 읽었을 때 첫 느낌은 "이거 고교나 대학 초년의 기본 교과서로 좋겠군" 였다. 복잡 화려한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현대에 2천년이 넘은 고대 로마의 책을 교과서로? 동양의 유불선, 서양의 기독 형이상학도 진작에 운이 다한 마당에 일개 듣보잡 시인의 철학시를?
희안하게도.. 막상 읽어보면 이게 정말 고대에 쓰여졌나싶게 참신 명랑 현대적이다. 모호하고 권위넘치는 철학적 개념어를 버리고, 시인답게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사물과 인간,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그림그리고 노래하듯 펼쳐보인다(라틴어를 몰라 직역에 가까운 철학시를 읽는다는 게 마냥 재미나지는 않더라만).
알다시피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시로 담은 책이다. 에피쿠로스는 37권의 책을 썼다고 하는데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100페이지 분량의 잠언, 단편, 편지글, 다른 저자의 책에 인용된 몇몇 구절만 남아있다(<쾌락>이라는 단행본으로). 결국 루크레티우스의 이 작품 때문에 에피쿠로스 사상의 전모를 알게되고, 더 중요한 건 서양은 이 책을 칼로 삼아 중세의 캄캄한 종교적 움막을 찢고 르네상스와 근대를 향해 나갔다는 점(참고로, 르네상스시기의 대표작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은 이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첫부분인 베누스 여신을 찬양하는 부분을 그린 것 <1417년, 근대의 탄생>참조)
왜 교과서급인가?
1. 완전히 바닥에서 생각한다. 천상의 명령이나 인간 같은 특정 종의 희망이 아닌 모든 사물과 종과 자연, 우주에 공통적인 불멸의 씨앗에서 출발해 보는 것. 따라서 이것은 육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 영혼 감각 운동 같은 인간과 자연의 모든 현상을 망라할 것이다. 더이상 나눌 수 없는 이 씨앗들의 무한한 운동과 결합 해체과정이 곧 우주. 현대물리학 등의 모든 과학은 이것에 기초한다. 놀라운 것은 에피쿠로스가 추론한 씨앗(원자)들이 가져야 할 3가지 성질, 즉 크기 모양 무게는 양자역학에서 각각 크기 스핀 질량으로 그대로 대응되고 입자들의 구별기준으로 활용된다.
2. 존재의 구성과 해체의 원리가 명료하다. 즉 씨앗들의 비껴감(편위)에 의한 우연적 만남과 이별들, 집합과 해체의 무한한 과정으로서의 우주는 제3자 개입을 필요치 않는다. 그러니 주인도 섭리도 의무도, 영혼불멸 같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우리는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수밖에.. 보편주의 철학들이 가지는 존재자에의 열망, 의무와 명령의 속성은 곧, 남자-어른의 철학이라면 에피쿠로스는 아이들의 철학이랄 수 있겠다. 아이에겐 모든게 눈깜박할새 지나가고 의무에서 이탈하는 재미난 사건들이니..
3. 사유의 이미지가 감각적이다. 형이상학의 추상적 변증술이 아닌 눈에 보여주는 철학. 일테면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포도와 그 향기로 비유한다. 포도가 사라지면 향기가 사라지듯 우리 몸이 죽으면 영혼도 사라진다. 향기가 가볍듯 영혼의 씨앗들은 섬세하고 가벼워 환각이나 꿈처럼 잘 침투하고 날라다닌다.. 이슬방울과 강과 바다, 봄과 새와 곡식, 연인과 사랑과 죽음..의 광대한 노래가 넘실대고 서로 공명한다. 말하자면 보이고 들리는 사유.
이 정도라면 아직도 절대주의와 보편주의 구름아래 답답하게 호흡하며 싸우는 현대의 정신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까.. 핵심은, 바닥에서부터 완전히 다시 생각해보는 것, 0도에서 허공과 사물을 응시하며...
🐍플라톤~기독교~데카르트~헤겔~맑스주의의 관념적 절대주의의 반대편에서 싸워온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스피노자-맑스-들뢰즈 계열에 대한 관심자들에겐 필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