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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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눌님이 가끔 ‘당신은 자기만 생각하는 마초 가부장이야!’라는 핀잔을 줄 때마다 ‘뭬야?’라며 발끈하지만, 사실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내나름 공평탕평하여 가사노동도 잘 분담하고 명절 등의 관혼상제날 시댁수발 노역도 최소화시키려 애쓰고, 자유부인 부럽지 않게 니맘대로 사회활동도 적극 장려하여 민주가정 건설에 이바지해왔다고 자부한 터인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가부장 소릴 듣다니... 도대체 여자들은 뭘 원하는게야? 라는 궁금증 해소와 요새 유행하는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채울 겸, 평소 눈을 베는 듯한 신선명료 날카로운 칼럼을 쓰시는 저분의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도전’한다니까, 그래 얼마나 쎄고 겁나는지 보자라며...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엥? 저항이 아니라 협상과 공존을 위한 운동이라고?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렇게 상황에 따라 모두가 약자가 되는데,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는게 왜 그렇게 어렵지?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인지 이 책은 페이지마다 너무 간곡해서 차분히 읽을 수가 없다. 너무도 익숙한 일상의 장면이 네거티브 필름 마냥 정반대의 색깔로 펼쳐지기 때문에 어지럽고 메스껍기도 하고. 그런데 어쩌랴, 기존의 규범과 상식에 도전하는 생각과 언어가 가진 숙명이고 체질을 바꾸는 명약은 명현반응을 일으키는 법, 책을 읽고 나면 뭔가 달라진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과거와는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책은 참된 지식을 알려주는 걸 넘어 나쁜 버릇도 고쳐준다. 한번 읽으면 생각의 습관들이 덜거덕거려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게 만드는 이런 책이 그렇다. 10년도 넘은 책이 여전히 강한 현재성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 밑바닥이 더디 변함을 반증도 하거니와 그만큼 사유와 경험이 치밀하고 치열하다는 뜻.
한국의 페미니즘에 관한 교과서라 불리는 책이니 가부장병을 조금이라도 치유하고 싶은 꼰대님이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준 남성이 되신 마나님들께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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