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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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칠이 했다는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 그러나 그나마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라는 말을 좌우 모두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처칠이야 당대의 파시즘, 볼세비즘에 맞서 자유민주제를 옹호하려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좌파도 민주주의를 신성시하기는 마찬가지. 좌든 우든 민주주의가 최상의 제도임을 믿는 것은 그 근원에 고대 그리스(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일 것. 작년에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이런 민주주의의 신화에 맞선다. 한나 아렌트가 최초로 구별했다는 데모크라시와 이소노미아의 차이에 영감을 받아..
- 민주주의(데모크라시)의 기원과 모범으로 숭상받고 서양 정치사상의 고향으로 여기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이미 '어떤 것'이 타락한 제도이다. 데모크라시가 'cracy'인 한 지배체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자유와 평등이 늘 모순을 일으킨다.
- 기원전 6세기전까지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보다 우월한 정치형태인 이소노미아(isonomia 무지배)가 실행되고 있었다.
이소노미아는 이동이 자유롭기에 평등이 가능했고, 독립자영농들의 노동을 중시하고 상공업이 발달했다. 반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자부담 중장보병)농민-전사 공동체였기에 가부장적 씨족제에 얽매였고 노동과 기술을 천시했으며, 여자 외국인 노예는 시민이 될 수 없었다.
- 탈레스..엠페도클레스..피타고라스..에피쿠로스에 이르는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이소노미아의 사상적 표현이다. 우주 만물의 생성과 운동을 제우스 아폴론같은 신이 아니라, 근원적 물질(아르케: 물 불 공기 흙..)의 운동으로 설명하는 자연철학은 종교적 씨족적 위계질서와 지배-피지배 사회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계약에 의한 사회원리인 이소노미아를 회복하려는 '사회철학'이기도 했다. 자연철학자들 대다수는 실제로 이소노미아를 회복하려 투쟁했고 그를 위한 학파(엘레아 학파 등)와 교단(피타고라스)을 만들기도 했다.
- 문제적 인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민주정을 타파할 '철인정치'의 모델로 내세우고, 반대파는 민주정을 지키기위해 자발적으로 순교했다고 주장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둘다를 부정하고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를 회복하려 하였기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늘 그의 귀에 들렸다는 다이몬의 명령 - 정치 혹은 공인(폴리스)으로 살지 말고 사인으로서 광장(아고라)에서 정의를 위해 활동 할것 - 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민회와 광장, 지배와 피지배의 구별이 없는 이소노미아를 회복하라는 명령이었다는 것.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원리처럼.
- 니체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의 근원인 플라톤을 비판하려면 그가 세운 '철학의 기원'인 소크라테스를 넘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까지 거슬로 왔는데,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의 사상과 정치를 회복하려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플라톤적 형이상학-신학을 부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인 셈이다(244)"
- 역사적으로 이소노미아는 9세기 아이슬란드, 18세기 독립혁명 전의 미국의 타운십(town-ship)에서 구현되었다. 아마도 오늘날에는 평의회, 코뮤니즘이 가장 유사한 형태일 듯.

이 책은 전작인 <세계사의 구조>의 후속편이다. <구조>는 맑스의 생산양식을 넘어 교환양식으로 세계사를 재구성하려는 대담한 저작. 유동사회의 호혜적 증여-답례를 교환양식A, 국가의 수탈-재분배를 B, 상품교환을 C, 교환양식 A가 고차원으로 회복된 형태를 교환양식D라 부른다. 교환양식A가 지배적인 시대는 물론 원시공산제, B는 고대-봉건사회, C는 근대자본주의 시대, D는 도래할 사회 및 (칸트가 말한) 세계공화국이 각각 대응한다. <구조>에서는 붓다, 예수, 마호멧 등의 모범적 예언자에 의한 보편종교가 교환양식A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본다.
이 책 <철학의 기원>은 그것을 종교가 아니라 정치와 사상에서 찾으려는 시도이고 저자는 이를 이오니아의 자연철학과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한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플라톤에서 시작하는 서양의 정치와 사상사는 다시 써야할지도... 가라타니 선생의 스케일은 암튼..ㅎㄷㄷ
게다가 슨상님의 문체는 쉽고 간명하여 잘 읽히니 일됵권고.
그나저나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는 커녕 간접민주주의조차도 너덜너덜한 이땅에서 무지배(no rule)라니.. 너무 허황해 황망키도 하지만 꿈이야 본디 황당해야 꿀만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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