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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도 바뀌겠지 - 2030 에코페미니스트 다이어리 ㅣ 이매진의 시선 8
안현진 외 지음, 여성환경연대 기획 / 이매진 / 2020년 1월
평점 :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 개학연기와 유치원 휴원으로 두 녀석들과 하루 24시간을 종일 집에 틀혀박혀 하루 세끼에 간식까지 챙겨 먹이며 돌봄·가사·감정 노동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여성노동을 둘러싼 사회 환경이 만들어낸 문제를 환기시킨' 용윤신님의 <자존감/일,여성,감정/나를 겨눈 화살을 바깥으로 돌리기> 글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사실 지금과 같은 코로나 시대가 아니었을 때도 나는 '엄마' 그리고 주부'라는, 내가 가진 수많은 정체성들 중 이 둘 앞에서는 영 맥을 추지 못했다. 나를 한없이 움츠러들게 하는, 힘이 쪽 빠지게 만드는 말이다. 엄마/주부로서 자신이 마땅한지, 자격과 자질을 자꾸만 의심하고 회의하게 되니 언젠가부터 가족과 함께 있는 집은 내게 가장 불편하고 힘든 공간이 되고 말았다. 어쩌다, 어쩌자고, 나의 자존감은 집에만 있으면 끝도 없이 추락하고 마는 것일까. 왜 '엄마/주부'라는 이름의 나는 한없이 쪼그라들까. 필자는 이 글에서 여성의 낮은 자존감이 여성이 하는 '일'에서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성별에 따라 자존감이 깎이는 경험을 하는 영역이 나뉘어 있다면 그 문제는 이미 사회 문제라 지적하며, 자존감 문제에서 성별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에 집중하는 여성주의적 접근을 시도한다. 감정 노동, 꾸밈 노동, 가사 노동, 돌봄 노동, 소비 노동에 이르는 여성이 하는 일련의 노동을 하나씩 짚으며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감정노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여성의 자존감을 하락시키고 있다. 첫째, 자기의 실제 감정하고 다른 감정을 표현하면서 자기를 부정하는 데 익숙해진다. 둘째, 분명히 노동하고 있는데도 사회와 자기 자신에게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119쪽)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꾸밈 노동을 단순히 여성의 본성이나 개인적 만족의 문제로 몰아버리는 태도는 꾸밈 노동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개인의 책임으로 한정하고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데 기여한다. (123~124쪽)
가정부를 따로 둘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대부분의 중산층 여성은 스스로 가사 노동을 한다. 가사 노동은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가족에게 기여하는 바 없이 남편이 주는 돈으로 살아간다는 오명을 얻기도 한다... 실제로는 가사 노동이 하찮다는 평가가 여성의 자존감을 낮추고, 낮은 자존감 때문에 여성은 저임금과 혹독한 노동 환경에 자발적으로 순응한다. (126~127쪽)
돌봄 노동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더욱 강하게 압박한다. 아이가 끊임없이 놀아달라고 할 때, 임노동과 가사노동을 하느라 피곤할 때, 아픈 가족을 오래 돌봐야 할 때, 여성은 돌봄 노동자라는 지위에서 도망치고 싶을 수 있다. 이때 모성애는 이런 생각을 하는 여성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며, 여성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엄마, 딸, 며느리라는 위치에 서서 스스로 반성한 뒤 미안한 마음을 안은 채 돌봄 노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려는 여성을 이기적인 엄마나 딸로 만들어 죄책감을 자극한다... 돌봄 노동을 여성의 본능으로 몰아가는 태도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 충실하지 못한 순간을 공격한다. 24시간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여성에게 24시간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해 구조적으로 죄책감을 만들어낸다. 죄책감은 자존감의 구성 요소인 자기 존중을 낮춘다는 면에서 자존감에 악영향을 미친다. (127~129쪽)
합리적 소비는 늘 실패한다. 모든 상품의 기능과 성분을 비교하고 분석해 합리적 선택을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돈과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자본이 제시한 선택지 안에서 골라야 한다는 측면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소비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죄책감과 그 결과인 낮은 자존감은 오롯이 여성들의 몫이다. (132쪽)
원인이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 맞서서 여성인 나는 어떻게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까?
필자는 일단 질문의 주어를 바꿔보라 한다.
'나는 왜 자존감이 낮을까?'라는 질문은 구조적 문제를 순전히 개인 탓으로 돌린다는 면에서 잘못됐다... '여성은 왜 자존감이 낮은가?' , '가난한 사람은 왜 자존감이 낮은가?' 이런 질문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게 하며, 생각만으로도 우리의 자존감을 올라갈 수 있다.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지 못해도, 무지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여성과 사회 약자의 자존감을 짓누르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133쪽)
그리고 글을 써볼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으로는 자존감이 낮아지는 순간의 상황과 감정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읽으면서 큰 힘을 얻는다. 먼저 글을 쓰면서 감정을 표출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고, 기록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자주 비슷한 불안에 빠지는지 알게 돼 좋다. 나아가 타인하고 관계를 맺을 때 큰 힘이 된다. 특히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은 순간의 기록, 갈등이 벌어진 순간의 기록이 도움이 됐다. 내가 쓴 글은 내 감정과 기억을 지켜주고, 나를 지지해준다. (135쪽)
그래서 지극히 사적인 생각과 감정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독후감이 아닐런지.
둘째 녀석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 까지 끊임없이 말한다. '나랑 놀아줘, 나랑 놀자, 누구랑 놀아?, 뭐하고 놀아?...' 아이들은 노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라지만, 요즘 나에게는 지상 최대의 난제다. 이 뿐이랴. 해도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이 있다. 얼마 전 이 둘을 해결해 보겠다고 친정에 갔다가, 부엌에서 종종거리는 엄마의 모습을 본 뒤 이것도 더는 못하겠구나 했다. 한 여성의 노동이 다른 여성에게 전가되고 말았다. 노동의 축소가 아닌 세대간 떠넘기가 된 것이다.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친정에서는 엄마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이 드니 내 쉴 곳은 정녕 어디인가. 아, 정말이지 몸도 마음도 너무나 힘들다,
삼시 세끼에 더해 간식까지. 녀석들 먹이는 것도 큰 일이다. 한 끼 정도는 간단하게 해결하고자 종종 배달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죄책감에 시달린다. 플라스틱 용기에 뜨거운 음식을 담으면 유해 물질이 얼마나 나오는지, 배달 음식이 필요 없는 쓰레기를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다.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입 밖으로 나오면 바로 공격과 비난이 쏟아진다. 생협 조합원, 녹색당, 에코페미니즘, 채식 지향 등을 말하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나의 이중적 작태를 낱낱이 들춰내고 마니, 결국 모두 다 나의 잘못이 되고 만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다 내 탓이로다.
'내 일'도 전혀 안녕하지 못하다. 츨퇴근이 정해지지 않은 일을 한다. 보통은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등교·등원한 후의 시간을 잘 활용하면 왠만한 일들은 다 해결이 되었다. 불가피하게 그 시간을 벗어난 일정은 남편과 조율하면 큰 문제없이 굴러갔는데, 코로나19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낮에는 엄두를 낼 수가 없다. 10분이면 끝낼 간단한 일도 1시간을 훌쩍 넘기기가 일쑤. 해서 급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면 왠만하면 모두가 잠든 시간을 활용하는데... 악순환이다. 시간 부족과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일상. 내게 오롯이 전가된 가사·돌봄 노동에 분개하지만 이내 그것을 제대로 못해 내는 자신에게 짜증이 솟구침과 동시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오니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
반면 '바깥'일을 하는 남편은 코로나19로 회식, 야근 등이 없어지면서'저녁있는 삶'을 되찾아 한결 여유로워진 듯 하다. 더구나 일주일에 한 번은 재택근무를 하니, 자연스레 아이들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분명 좋은 일이다. 바람직한 방향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남편이 누리는 그 여유만큼의 정신적·육체적 짐들이 내게 더 얹어진 게 아닐까. 일만 하고 안 놀아주는 엄마와는 달리 제 기분에 맞춰 착착 놀아주는 아빠를 눈만 뜨면 찾는 둘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서운하고 아쉽고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러면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는 내가 너무 웃기다.
뭐야, 결국 다 내 탓이라니!
스스로를 '불량주부'라 소개하곤 한다. 엄마로서 자격도 함량도 미달인 존재라 말하기도 한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개의치 않았다. 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애써 낮추면 오히려 주위 상황이나 분위기가 한결 나아지더라. 사람들은 자신보다 못하다 여기는 이들에게 한결 너그럽다. 참 희한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간 그 희한함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분명 '이용'했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나의 자존감을 버리는 것과 다름 없었음을 아프게 깨닫고 말았다. 나를 향하던 화살을 세상으로 돌리라 했던 그 말이 이제야 가슴에 꽂힌다.
문제를 개인에게 두면 각자의 자존감은 더욱 낮아지고 세상의 차별은 더 공고해진다. 이제 나를 향하던 화살을 세상으로 돌리자. 우리가 나누는 공동의 경험에서 공통의 문제점을 찾아내자. 세상의 긍정적 변화를 만든 행동들은 문제의 화살을 외부로 돌리는 데서 시작한 사실을 기억하자. (136쪽)
시대불문 세대불문 대부분의 여성이 가사와 돌봄이 늪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 고통에 가족도 사회도 무감각하기만 할까.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이 바뀌기나 할까. 나를 향하던 화살을 세상으로 돌리니 뭔가 삐딱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나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적절한 크기의 삐딱함이 세상을 만들었음을. 책 제목에 쓰여진 '이렇게'는 '짝눈을 하고 짝다리를 짚고 선 삐딱함'을 품고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챘다.
이렇게 살다보면 세상도 바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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