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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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어가는’ 새벽.
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되어가다’ 는 말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뭅니다.
조급해 하지 않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이 느껴지네요. 기다림의 또다른 말처럼 다가오기도 하네요.
시집의 제목이 퍽이나 마음에 듭니다.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시집의 제목을 그대로 옮겨 써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나는 ‘무엇이’ 되어가는 걸까요?” 라고 적습니다. 아아.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일까요?”
.
시집이 한 권 생겼습니다. 딱 봐도 그 자태가 아주 곱습니다. 자랑했더니, 친구는 말합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거늘! 어찌 시가 눈에 들어오리오!” 언뜻 핀잔인 듯 들리나, 시조 속 한 구절과 함께 던진 그 말이 밉지는 않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낚아채듯 시집을 가져간 친구는 책장을 한 번 후루룩 넘기고, 다시 덮고, 호흡을 가다듬고, 시집 어느 부분을 펼치다니, 읽습니다. 읽습니다. 읽습니다...

... 아름다움이란 것은 대단해서 아름다움에 처하면 누구나 안쪽으로 휘말릴 수밖에 없다 너무 밝은 날, 밝음이 밝음에 육박한 날이었는데 아름다움을 넋 없이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죽지 않은 사람을 믿지 않는 건, 질량이 질량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질량이라는 건 탓을 전가하기에 탁월한 허위로 이루어져 있다....
- ‘캐러멜라이즈’ 중에서

시집을 읽는 우리만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그저 펼쳐 보고 읽으면, 한 사람은 그저 듣습니다. 시집에 실린 시 대부분이 비교적 긴 편이라, 나는, 좋았습니다. 시를 읽는 친구의 모습을 좀 더 바라볼 수 있어서, 그 목소리를 좀 더 들을 수 있어서. 대체로 번갈아가며 하지만, 그날 나는 듣기만 했고 친구는 읽기만 했습니다. 그날은 그리하자는 ‘암묵’적 동의가 이루진 듯 합니다. 절대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는 못됩니다. 하지만 시 ‘암묵’을 읽은 후에는 제법 긴 침묵의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문장은 욕망의 한 방향에 놓여 있다고 본다 뭐,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욕망은, 욕망의 반대를 향해 있는 것 같다고 언뜻 생각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사랑을 하고 비켜나고, 사랑을 하고 합리화하고... 너무 많은 원인을 내가 아닌 것들에 부여한다 부여된 것들은 나로 인해 존재된다 나는 부여하기에 존재된다 여기에 반복되는 부끄러움이 역겨움이 아름다움이... 핑계는 참으로 아름답고 바쁘며 길기까지 하다 될 필요가 없는 사랑마저 되고 만다 암묵적 욕망 때문이다.
- ‘암묵’ 중에서

시 ‘검은 돌의 촉감’을 읽고도 잠시 정적.

묻습니다 실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 현명한 의자에 앉아 패배보다 실패를 실패보다 실수를 실수보다 검은 돌을 검은 돌보다 흰 돌을 흰 돌보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오래 연민합니다 연민을 복기하지는 않습니다...나조차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만져질 수 없고 돌조차 만져질 수 없습니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자꾸 만져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반복하겠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실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 ‘검은 돌의 촉감’ 중에서

그러다 ‘너는 요즘 어때?’ 서로의 안녕, 안위,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말말... 오욕칠정을 몽땅 끌어다 담은 말들의 향연이 펼쳐지니! 이 말들을 그럴싸하게 엮어 만들면 한 편의 산문시가 되고도 남겠다는 얘기에 꺄르륵꺄르륵.

‘친구야, 우리 함께 시를 읽자꾸나’ 하며 작정하고 만나는 건 아닌데, 이 친구와 만나면 울고 웃고 떠드는 가운데 자연스레 시가 함께 어우러지곤 합니다. 물론 늘 그러는 건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하지만 시가 우리를 엮은 건 분명합니다.

그때로 거슬러 가봅니다. 힘찬 연어처럼! 문학시간 숙제가 있었습니다. 시 두 편을 음악과 함께 낭독해 테이프(붙이는 테이프 아니구요!)에 녹음하는. 그 때 나는 류시화 시인의 시 두 편을 녹음했습니다. 녹음한 기억은 나는데, 그걸 문학 수업 시간에 들은 기억은 없습니다. 친구는 내게 그 테이프를 자기에게 줄 수 있냐 물었고, 선뜻 나는 건냈던 장면이 흐릿하게 떠오릅니다. 마주본 우리는 조금 웃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시가 되자’ 말한 것도 같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껏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다시, 새롭게,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은 서슬퍼런 냉전기도 하염없는 공백기도, 다 ‘시’였구나.

아, 내가 다시 ‘시’가 되어가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 ‘여름 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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