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지음, 공양희 옮김 / 민들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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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빵과 뒷동네도서관 도서입력 작업을 하면서 제목만을 처음 들었다. 책이란 실체는 없고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정가만이 적힌 목록으로 구름빵은 말하고 나는 키보드를 두드렸던. 암튼 그때 제목을 듣고 입력하며 제목이 퍽이나 특이하다 말하자, 구름빵은 책 내용도 참 좋다고 꼭 한 번 읽어보라 적극 추천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제목에서 ‘배움, 두려움’이란 단어는 차치하고, ‘춤출 수 없다’라는 말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문다. 왜 하필 ‘춤추다’란 말을 썼을까.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할 수 없다.’로 (굳이) 바꿔본다. 식상하고 밋밋하다. 지나치게 정직한 느낌이라 재미없다. 그야말로 ‘학교화’된 제목이 아닐 수 없는데, ‘춤추다’는 뭔가 다르게 느껴지긴 한다.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훈련된 TV 속 아이돌의 춤사위. 그것에서 느껴지는 감흥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내면의 원초적이고 본능적 힘에 이끌려 그 어떤 순서도 형식도 없는 몸짓이 그려진다. 춤도 본디 이래야 할 것인데, 교육은 말해 무엇하리.

“사실 우리가 쉽게 ‘교육’이라 부르는 이 일에 무슨 특정 공식이 있다는 것이 웃기지 않은가. 한 인간의 삶은 밖에서 계획되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힘에 의해 이끌리거나 방향을 갖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정말 그렇다. 그 힘을 운명이라도 해도 좋고 카르마, 성령, 한 존재 속의 ‘고차원적 힘’ , 유전적인 성벽, 무의식, 뭐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된다.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그 힘(‘힘들’이라고 해도 된다)은 아마 그 모든 것들이 뒤섞인 알 수 없는 무엇일 것이다.” (24쪽)

얼마전 프리다, 구름빵과 함께 힘모아 이반 일리치의 책 <학교없는 사회>를 용케 읽어냈다. 함께 읽기의 힘을 몸소 실감한 우리는 모임을 좀 더 키워보자 의견을 모았다. 무엇보다 대안학교 학부모 공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다음 책을 고민하다가 책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를 선정했다. (대안)교육 관련 책으로 단순히 분류한 것. 그런데 책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진실로 문제가 되는 것들을 그야말로 진실하게 담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내적 자아와의 관계, 두려움을 다루는 문제, 삶의 정수를 농축시키는 일, 자아상을 만들어내고 삶의 일화들을 창조하는 메타포를 발견하는 일, 신에 관한 문제, 인종과 계급, 성 그리고 공동체 등등.’ 각 장마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같은 쟁점들은 아이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쟁점들인 것. 해서 이 책은 옮긴이의 말마따나 ‘총체적 삶에 관한 보고서’에 다름 아니다.

‘독’한 사람들, 첫 모임을 하루 앞두고서야 다 읽었다. 두께에 비해 밀도가 상당히 높은 책이다. 쉽사리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모든 이야기와 철학은 철저하게 실천에 근거해 있고 관찰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성장해온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기에 감히 허투루 넘길 수가 없다. 프리다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 것 같다. 각 장을 서로 나눠 다시 꼼꼼하게 읽고 발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문제로 환원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그런데 굳이 의도치 않더라도 자꾸만 그렇게 된다. 읽기에 꽤나 자주 제동이 걸리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허나 그래야 좋은 책이 아닐까.

# 들어가는 이야기
- 해나가면서 이루기

책을 읽으면서 알바니와 길이 자꾸만 겹쳐지며, 더불어가는배움터길 ‘사람’들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우리의 이 조그만 학교가 가진 ‘체제’라는 것은 단지 계속 바뀌어가면서 학교를 꾸려가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독특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프리스쿨은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상황이지 정적인 체제나 방법, 철학일 수 없다.
여기서 공동체라고 할 때는 그 단어가 지닌 가장 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를 뜻한다. 하루하루 그 공동체가 전개되어 나갈 때 개인들 한 명 한 명 스스로 결정해서 참여한다. 학교는 모든 사람들이 성장하는데 매개물이 되어주며, 그 성장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의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프리스쿨은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상황이지 정적인 체제나 방법, 철학일 수 없다.” (24~25쪽)

이곳에서 나도 그 ‘한 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좀 기뻤다. 그런데 어쩌다 민찬이는 길에 다니게 된 걸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우리는 그런 낌새를 알아채고 거부할 수 있기 전에 학교라는 이름의 거대한 군대 속으로 모두 징병당했다. 그리하여 어른이 된 우리들은 거의 대부분 말없이 자동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 전통을 물려준다. 그리고 그 전통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의 어떤 부분에도 의문조차 품지 않는다.” (28쪽)

이반 일리치 또한 끊임없이 강조한다. (학교)교육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팔려는 현대문명의 수백 가지 방법에 대항에 끊임없이 깨어있으라고. 그렇게 깨어있음으로써 우리는 의존형 인간의 대량생산을 멈추게 될 것이라고.

독자적 스타일로 살지는 못하나 소심하지만 일관된 반골 기질로 살아와서 그런가, 현재 민찬이는 대안학교에 다니고 (민찬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긴 하다. 그렇다고 단지 그것으로 행여 ‘나는 깨어있는 사람’이라 착각하거나 위안을 삼아서는 절대 안 될 일. 하긴 내 안의 두려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그런 잘난 척도 할래야 할 수 없는 일. 두려움은 배움과는 물론 가르침도, 양육도 그 어느 것도 함께 춤출 수 없음을. 결국 인생은 두려움과 벌이는 끝없는 접전의 장이 아닐까 싶다. 든든한 도반을 만나 함께 하는 수밖에. 내가 여기 있는 이유다.

기본기. 나는 그것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모든 어린 동물들이 그렇듯, 우리 아이들 또한 세상에 나면서부터 스스로 배우는 능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기본기로 삼고, ‘독’한 사람들과 ‘함께’ 탄탄하고 착실하게 다져볼까 한다. 독처럼 너른 마음으로 때론 외로울지언정 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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