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시화집
가네코 미스즈 지음, 조안빈 그림, 오하나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원두를 탈탈탈 털어 갈아 커피 한 잔을 겨우 만들었다. 책 <내가 쓸쓸할 때>를 살며시 커피잔 곁에 두었는데, 갑자기 ‘내가 쓸쓸’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난 이럴 때 좋다. 괜히 뭔가 쓸쓸해지는 그 순간이, 참, 좋다. 눈물이 핑. 함께 쓸쓸해주는 주는 노래와 책이 있으니 눈물이 글썽. 주의! 주르륵 단계까지 가서는 안 된다. 쓸쓸함을 넘는 청승은 사양.

쓸쓸할 때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모르거든.

내가 쓸쓸할 때,
친구들은 웃거든.

내가 쓸쓸할 때,
엄마는 다정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
부처님은 쓸쓸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는 일본의 대표적인 ‘동요시인’ 가네코 미스즈 시화집이다. 일본에서는 그의 동시를 동요라 부르며 시이자 노래로 여긴다니 ‘동요시인’이란 말이 낯설지 않다. 실제로 낭송해 보면 느껴진다. 그 속에 살아있는 율동감과 리듬감이. 실제로 일본에서는 여러 사람이 시인의 동시를 노래로 만들어 왔고, ‘가네코 미스즈, 생명의 노래 콘서트’ 가 열리고 있단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수 이효리, 루시드 폴이 그의 팬이라 밝혔고.
나는 ‘찐감자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만들고 있는 친구가 자꾸만 생각났다. 가네코 미스즈의 동시를 알려주고 싶다. 벌써 알고 있으려나? 그렇다면 노래를 어서 만들어 보라고. 가네코 미스즈의 동시를 느끼고 간직하는 방법 중 단연 으뜸일 듯.졸라봐야지.

가만가만 낭송해본다. 가슴과 머리가 맑아진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게 된다는 말도 그렇고.

별의 수

열 개 뿐인
손가락으로,
별의
수를,
세고
있어.
어제도
오늘도

열 개뿐인
손가락으로,
별의
수를,
세면서
가자.

언제 언제
까지나.


이상함

난 이상해서 견딜 수 없어,
검은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난 이상해서 견딜 수 없어,
파란 뽕잎 먹는,
누에가 하얗게 되는 것이.

난 이상해서 견딜 수 없어,
아무도 손대지 않은 박꽃이.
혼자서 활짝 피어나는 것이.

난 이상해서 견딜 수 없어,
누구에도 물어봐도 웃으면서,
당연하지, 라고 말하는 것이.

그러다가 문득문득 쓸쓸해지고 슬퍼진다.

풍어

아침놀 붉은 놀
풍어다
참정어리
풍어다.

항구는 축제로
들떠 있지만
바닷속에서는
수만 마리
정어리의 장례식
열리고 있겠지.



우리집 달리아 핀 날에
주막집 검둥이는 죽었습니다.

집앞에서 노는 우리에게,
언제나, 화를 내던 아주머니가,
흑흑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그 일을
재밌는 듯, 이야기하곤,

문득 쓸쓸해졌습니다.

놓쳐버리기 일쑤인,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은 찰나의 순간을 기어이 붙잡아, 기어코 글로 지어낸 시인이, 고마웠다.

제비

휙, 제비가 날아든 바람에,
이끌려서 봤지요, 저녁 하늘을.

그리고 하늘에서 찾아냈어요,
입술연지만큼 고운, 저녁노을을.

그러고 나서야 생각했죠,
마을에 제비가 왔다는 걸.

돛단배

잠깐
물가의 조개껍질 보는 사이,
그 돛단배는 어딘가로
가 버렸다.

이렇게
가 버린,
누군가가 있었다 —
무언가가 있었다 —

마감 날짜가 지났음을 어제, 깊은 밤에 알아챘다. 그래서 ‘소원’을 소리내어 읽었다. 간절히 빌면서.

소원

밤이 깊어 가는구나,
졸리구나.

몰라, 몰라, 자 버리자.

한밤중에, 이 방에,
빨간 모자 쓰고 불쑥 나타나,
몰래 수학 숙제 해 놓는,
영리한 난쟁이 한 명쯤,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거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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