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백한다. 나의 단순 무식함을. ‘파일명 서정시’ 제목만으로 이 시집이 서정시의 집합체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서정시는 주관적인 개성의 문학인 동시에 자신의 감정표현인 것’이라고 했으니. 문제는 내가 ‘서정=낭만’ 이라는 등식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 (등신이었다.)

그래서 너무 놀랐다. 시집의 여는 시 ‘눈과 얼음’(미투 폭로를 계기로 쓰인 시라고 한다)을 보고. 세상 편한 자세로 시집을 펼쳤던 나는, 시집의 첫 시를 읽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머리를 매만지고 자세를 가다듬고 한 편 한 편 읽기 시작했다. 이 시집을 두고 서울신문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무슨 일’에 대해 쓰겠다는 시인의 다짐이자 결과’라 했는데, 과연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세월호 참사,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여성들이 겪는 폭력 등 사회적 아픔을 시인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시집은 ‘간신히 벌린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말’들의 응축체에 다름 아니다. 읽게 되면, 앎을 넘어, 앓게 된다.

시인은 “현실의 고통이 문학적 언어로 전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는데, 시인의 시를 처음으로 접한 나는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 그의 시에서 전해진 고통과 아픔으로 정신없이 온몸으로 앓고 있다. 지금까지.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흘러내리는 말. 모래 한줌의 말. 혀끝에서 맴돌다 삼켜지는 말. 귓속에서 웅웅거리다 사라지는 말. 먹먹한 물속의 말. 해초와 물고기들의 말. 앞이 보이지 않는 말. 암초에 부딪치는 순간 산산조각 난 말. 깨진 유리창의 말. 찢긴 커튼의 말. 모음과 자음이 뒤엉켜버린 말. 발음하는 데 아주 오래 걸리는 말. 더듬거리는 혀의 말. 기억을 품은채 물의 창고에서 썩어가는 말. 고름이 흘러 내리는 말. 헬리콥터 소리 같은 말. 켜켜이 잘려나가는 말. 잘린 손과 발이 내지르는 말. 핏기가 가시지 않은 말. 시퍼렇게 멍든말. 눌린 가슴 위로 내리치는. 말. 땅. 땅. 땅. 땅. 망치의 말. 뼛속 깊이 얼음이 박힌 말.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말. 감전된 말. 화상 입은 발. 타다 남은 말. 재의 말.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시 ‘문턱 저편의 말들’의 일부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돌아오지 못한 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또한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임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우리의 상처를 위무하는 나희덕의 모든 것들이 <파일명 서정시>에 들어 있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