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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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는 서유미 소설집이다. 나에겐 꽤나 익숙한 이름. 10년전 읽었던 소설 <쿨하게 한걸음> 작가다. 이 작품이 두 번째 작품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몇 편의 작품이 더 있었다. 십년을 전후로 작가의 단 두 작품만을 읽은 나는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가 <쿨하게 한걸음>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했다. 굳이 말하자면 ‘쿨하게 한걸음, 10년 후 이야기’랄까.

# 나를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바로 ‘조급하고 기대에 찬 나’이다. 가혹할 것은 없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지 제대로 알지고 못하면서 기대만 잔뜩 하고 있었다. (<쿨하게 한걸음> ,186쪽)

다시 또 읽게될 줄이야. 밑줄이 그어져 있고 ‘바로 지금의 나’라고 적혀있다. 그땐 그랬지, 하며 잠깐 웃었다. 지금의 나는 기대 대신 양보, 포기, 인정 등으로 상황에 따라 그 이름을 바꿔가며 자기 합리화를 꾀하며 사는, 조금은 비겁한 현실 순응자가 되어있다. 하지만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를 읽은 뒤, 어쩌면 나도 ‘비로소 일어서는 사람’ 일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쿨하게 한걸음>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쉽게 읽혔고, 무엇보다 마치 내 일기장을 보는 듯 했다. 언젠가 쓴, 언제가 씌여질 나의 이야기라며 흥분하며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또한 그랬다. 등장 인물 면면들과 풍경들이 나는 물론 나를 위시한 모든 것과 참 많이도 닮아 있었다. 내 생각과 말을 대신 해줘서, 가려운 곳을 벅벅 긁어주는 시원함을 느끼면서도 쓸쓸했고, 외로웠고, 아팠고, 슬펐다.

# 이사를 가고 싶은 것과 이사를 갈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라 보증금을 올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고 월세를 더 내려면 수입이 늘어가더나 지출을 줄여야 했다. 현실적으로는 대출이 불가능하고 더 벌 수도 없으니까 쓰는 걸 줄여야 했다. 그동안 잠도 줄이고 게으름 피우는 시간도 줄이고 말도 줄이고 꿈과 기대와 감정까지 줄이며 살았는데 여전히 뭔가를 더 줄여야만 했다. (에트르, 12쪽)

# 막상 10년차에 접어들자 두 사람은 결혼생활과 자신들의 30대가 이토록 빨리 흘러가버린 것에 각자의 방식대로 놀랐다. 둘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쌓였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고, 그 세월이 더께가 아니라 마른 낙엽처럼 부서지고 먼지처럼 흩어져버리는 것이라는 게 허무했다. 아이가 잘 크고 둘 다 건강하게 밥벌이를 해내고 있으며 남편과의 사이가 그만그만하다는 것에 의의를 뒀고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전세금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잘 살고 있는거라고 자위했다. (뒷모습의 발견, 100쪽)

# 장례 절차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인을 보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건데 돈만 지불하면 염습도 반함도 입관도 파견된 장례 전문가가 다 처리해준다. 생전에 고인이 원하던 죽음의 방식과는 상관없이, 상조 회사의 얼마짜리 상품에 가입했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가족들은 각자 시간을 내서 지인들에게 연락하고 자신의 슬픔은 알아서 추스르면 그만이다. 죽음은 변하지 않았고 죽음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죽음의 처리나 절차, 의식은 점점 간소화되고 세련되게 포장되었다. 슬픔이나 애통함은 밖으로 흘러넘치지 않게 단속하고 죽음 자체도 전선처럼 피복에 싸여 땅 밑에 묻어버리거나 송전탑처럼 높이 띄워버렸다. (이후의 삶, 148쪽)

# 임신과 출산을 통과하는 동안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내가 바라던 삶과 방향이나 목적지, 경유지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마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열차에 올라탄 것이었다. 잘못됐음을 깨달았을 때는 돌이키기 힘든 상태였다. 승차권의 교환이나 환불 시기는 지나버렸고 되돌아갈 차편도 없었다. 출발지는 사라져버린 지명, 지역이 되어버렸다. (변해가네, 171쪽)

작품 속 20대 취준생 자매, 10대 가출 청소년, 결혼 10년차 부부, 이혼한 중년 남성, 60대 여성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다. ‘나름대로 자신의 생활 속 질곡을 타개하기 위해 열심이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들’인 것이다. 이 작품은 ‘소시민의 위기와 불안’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고 명확하게 밀고 나간다. 그래서 그들이 맞이할 내일이 희망적이리라 예상하긴 쉽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비관적이리라 단정하기도 어렵다. 작품 곳곳에서 그들이 ‘비로소 일어서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기 때문이다.

상자를 집어들면서 나는 그 안의 케이크가 얼마나 뭉개졌는지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케이크 상자를 품에 꼭 안았다. (에트르, 30쪽)

나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다. (개의 나날, 40쪽)

읽고 싶은 책을 샀고 눈치 보거나 방해받지 않고 아무 때나 펼쳐서 읽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책을 더듬더듬 읽다가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그었다. 그럴 때면 찰나지만 이 생활이 충분하고 완벽에 가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변해가네, 175쪽)

찌그러진 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단단히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자신 안에 누군가와 함께 보낸 시절이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순간, 여전히 팔목은 시큰거리지만 치매 걸린 엄마의 웃는 표정 하나로 기억되는 하루도 나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에 그들은 비로소 내일을 기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달프면 고달픈 대로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결연한 수락의 자세가 있고 파국 앞에서의 체념과 무력감 대신 뭉개져버린 희망을 재건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묘한 생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덕분에 ‘비로소 일어서서 쿨하게 한걸음’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현실의 나를 소리없이 다독’거리는 ‘여기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 책을 읽는 동안에만 잘못 살아왔고 잘못 살고 있다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책 속의 인물만이 현실의 나를 소리없이 다독거렸다. 여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이게 나의 실패고 진짜 얼굴이야.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였다. (변해가네,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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