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http://www.hakdo.net) 공동대표이신 김종성(계명대교수)님의 글입니다.
진정한 독서문화의 발전을 가로막는 ‘한국 독서능력 검정시험’을 반대한다.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이 주최하고 한국 독서능력 평가원이 주관하여 4월 17일 실시할 예정인 ‘한국 독서능력 검정시험’을 크게 우려한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 계획은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소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에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언해 본다.
[‘한국 독서능력 검정시험’의 문제]
1. 독서능력 시험은 입시위주 교육의 풍조를 부채질한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병폐는 초중등 교육이 대학입시라는 지상과제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독서능력 시험을 시행하여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로 활용하고 대학입시에 참고하도록 한다면 결과적으로 입시위주 교육의 분위기를 자극하고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독서 습관을 갖는 것은 평생 교육의 방법이며 전략으로서, 나아가 일생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으로서 강조되고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지 입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암기 위주의 독서는 진정한 독서의 의미를 가로막는다.
계획에 따르면 이 시험은 기본적으로 가장 단순한 지적 능력인 암기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책에 나오는 줄거리, 등장인물, 시대적․공간적 배경, 특기사항 등을 중심으로 객관식 유형 위주의 문제를 출제하겠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취지는 책 읽기를 또 하나의 암기과목으로 전락하게 하여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과 가치를 차단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획일적인 암기 독서는 타율적이며 강제적인 독서습관을 만들어 왜곡된 독서문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3. 독서능력은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받아쓰기 시험과 같이 단순한 글자 사용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독서능력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생각이다. 독서가 단순히 문자를 해독하는 행위나 데이터를 암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감성과 지성이 통합적으로 활동하여 내면의 성숙을 지향하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단편적인 방법으로 독서능력을 측정하겠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자로 재어 등급을 매기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비교육적이며 비인간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4. 독서를 매개로 한 교육상업주의를 경계한다.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획일적 독서능력 시험은 독서를 매개로 하여 상업적인 전략과 의도가 교육에 침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독서가 내신성적과 대학입시에 도움이 된다는 분위기 속에서 독서 산업이 크게 팽창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독서의 기능화, 수단화를 부채질하여 건강한 출판문화와 독서문화를 저해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마당에 독서능력 검증시험을 시행하게 되면 공공의 영역에서까지도 독서를 비즈니스 대상으로 삼는 것이 되며, 나아가 상업적인 논리가 교육의 논리를 압도해 버리는 교육상업주의를 팽배하게 할 것이다.
5. 도서목록을 매개로 한 독서권력집단화를 경계한다.
권장도서목록은 독자에게 묘한 권위와 함께 수용된다. 특히 독자가 주체적이고 성숙한 독서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 심각해진다. 그래서 그것이 가지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능력 검정시험을 위한 도서목록이 권력화 될 수 있다는 데에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한다. 이러한 문제는 결과적으로 이 시험을 주관하거나 주최하는 집단이 권력화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나아가 건전한 출판문화와 독서문화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독서문화 창달을 위한 제언]
1. 독서는 기능이 아니라 문화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독서교육을 지나치게 기능과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기술과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나 독서는 몇 가지 기술을 익히고 방법을 습득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환경과 문화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독서 기술과 방법을 가르치는 것보다 독서 환경과 문화를 조성해주고 제공해 주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며 바람직한 독서교육이라는 것이다. 교육행정당국과 학교당국, 그리고 학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환경과 문화를 만들어 주는 일에 행정력과 예산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문화를 확립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2.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는 일이 독서능력 신장의 지름길이다.
학교 현장에는 학교도서관이라는 전통적이며 효과적인 독서지원 기관이 존재한다. 학교도서관이 정상화되면 손쉽게 안정적인 독서기반을 확보하게 되어, 독서능력이 신장되고 다양한 교육적 성과를 얻게 된다. 새로운 방법을 통해 독서교육 문제를 해결하고 학습능력을 신장하기 위해 에너지를 투입하기보다는 기존의 시설과 제도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학교도서관을 중심으로 독서환경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전략이라 생각한다. 학교도서관에 전문 인력을 배치하고, 자료를 확충하며 시설과 장비를 개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며 바람직한 독서문화 강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3. 교사와 교육관료의 책읽기 운동을 먼저 전개하라.
학생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무리한 시도를 하는 것보다 교사와 교육관료가 책 읽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책 읽는 부모에게 책 읽는 자녀가 나고, 책 읽는 교사에게 책 읽는 학생이 난다. 그런데 교사와 교육관료들은 책을 읽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려고 한다. 어른들은 책을 읽지 않으면서 아이들은 책을 읽으라고 한다. 그것은 가장 비교육적인 방법이다. 진정한 독서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관료와 학교 경영자, 그리고 교사가 먼저 책을 읽어야 하며 책 읽는 여건을 만들어 가야 한다. 죄 없는 아이들을 시험으로 잡아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발상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