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읽기] 맨날 집 비우는 아내

아내에게 가정 일에만 충실하란 말은 무리한 요구일까. 직장생활 20년째, 결혼생활 18년째인 K씨(46). 정년이 보장되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명예욕과 일 욕심이 많아 그동안 늘 일에 파묻혀 지냈던 것 같다. 자연 집안 살림과 자녀 양육은 전업주부인 아내 몫이었는데 다행히 괜찮은 집도 장만했고 아이들도 무난히 자라고 있다.

이처럼 일에서의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살던 K씨지만 중년에 접어들자 일보다는 가족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름 전엔 급기야 '앞으로는 가급적 일찍 귀가해 아내와 오붓한 저녁식사라도 하리라'는 결심을 했다. 물론 그에겐 자신의 변화를 아내가 기뻐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다음날 오후 퇴근시간까지 일을 대충 마무리한 그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반길 줄 알았던 아내는 집에 없었다. 아내는 2시간 이상 기다린 후에야 나타났는데 자신을 보더니 미안해 하는 기색 하나 없이 "웬일이냐?"고 묻는 게 아닌가.

K씨는 기다림과 배고픔에 지쳐 슬그머니 화가 났지만 그래도 웃으며 "앞으로는 가급적 집에서 저녁을 먹으려 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아내는 대뜸 "그 나이 되니까 저녁 때 갈 데도 마땅찮은 모양"이라고 내뱉는 게 아닌가. K씨는 순간 무안하고 불쾌한 마음이 들어 밥 차려달란 말도 안하고 TV 채널만 연신 돌려댔다.

그날 이후 K씨는 하루 한 번씩은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아내가 전화를 받는 날은 드물었다.

알고 보니 아내는 매일같이 친구.언니.이웃 등과 어울려 쇼핑도 하고 애들 학원이나 부동산 정보를 주고 받느라 자신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K씨는 아내의 행동이 못마땅하다. 솔직히 그처럼 바쁜 일과를 보낸들,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요, 아이들이 특출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먼저 K씨는 아내를 원망하기 전에 그간 일 때문에 아내에게 무심했던 자신의 태도를 돌아봐야 한다. 또 아내도 하루 생활을 자신에게 편리한 방향으로 관리.운용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중앙식 난방과 가전제품이 보편화 된 요즈음 주부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가사노동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주부의 발목을 잡는 자녀 양육 부담도 아이들 성장과 함께 가벼워지게 마련이다. 특히 K씨집처럼 아이들은 방과후 학원으로 직행하고 남편마저 밤 늦은 퇴근이 일상화된 가정에선 전업주부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고 주변사람과의 사회활동을 찾게 마련이다.

이렇게 1년, 2년 세월이 흐르다 보면 결혼 10년차 이상된 주부들에게는 남편이 회사 생활을 하듯, 자신의 하루,1주일, 한 달 일과가 어느 정도 정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K씨처럼 예고없이 불쑥 저녁 때 나타난 남편의 존재는 자신의 생활을 침범하는 불청객(?)의 방문처럼 느껴질 수 있다.

아내의 상황을 헤아린 뒤엔 아내의 현재 삶을 지탱하는 근간에는 남편인 자신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도 부드럽게 아내에게 일깨워 줘야 한다. 그런 뒤 이제부터라도 서로의 존재가 즐거울 수 있는 소재를 하나씩 찾아야 한다. 부부간 애정도 결혼의 언약에 의해 당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만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오늘 오후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둘만의 저녁 외식을 제안해 보자.

자료제공 : 중앙일보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200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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