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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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선택하는 안목이 부족한 사람들의 도서선택은 일반적으로 ‘수상경력’을 따진다. 수상=좋은 작품이란 등식의 Signal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평소 이런 유의 선택을 애써 멀리했는데 휴고 상 등 권위 있는 SF소설 상 3개를 동시에 수상한 최초의 작품이란 뉴스는 평소의 습관을 거스를 정도로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책은 휴고 상이나 네뷸러 상 수상작 특유의 장편소설 형태가 아닌, <종이동물원>을 표제작으로 한 단편 14개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긴 내용과 때마침 걸린 독감으로 인해 발췌독의 유혹이 있었지만, 저자 Ken Liu의 우리나라 처녀 소개작이자, 트로이카 수상작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첫 편부터 찬찬히 읽어나가는 정공법을 택했다.

  <종이동물원>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인해 미국 주류사회에 겉도는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 모정이란 주제를 빌려 담담히 전개된다. 자신의 이국적인 얼굴에 자격지심을 가진 ‘라오후’의 빗나간 동심은 사고무친 중국인 어머니에 대한 냉대로 이어지고, 덩달아 아들을 위해 엄마가 접어준 종이동물도 힘을 잃어간다.

안타까운 엄마의 죽음 뒤 우연히 종이호랑위에 쓰여진 엄마의 절절한 편지는…….

모자간의 정은 이렇게 보편적인 테마가 되나보다.

  동양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이 밖에 <즐거운 사냥을 하길> <파자점술사>, <송사와 원숭이 왕>에도 엿볼 수 있다. 각각 여우 전설, 한자를 해체해 미래를 유추하는 점술, 손오공을 연상시키는 일화가 경쾌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머금은 채 등장한다.

그 메시지는 CCTV, 인공지능, 로봇신체의 편리함 뒤에 숨은 ‘초감시사회’의 병폐와 그런 시대적 조류에 반하려는 자유의지를 가진 등장인물의 분투, 거대한 시대의 조류에 매몰된 개개인의 역사적 의미와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데, 책의 후반에 이 같은 작품이 집중 배치되어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특히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타임머신 개발로 과거여행을 가능해진 사회에서 ‘731부대’, ‘위안부’문제 등에 대한 미래 세대들의 역사관을 다루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재라 자연스럽게 집중이 되었는데, 저자의 결론은 믿음직하다. 시대적 특수성을 주장하며 잔혹했던 행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파시스트들에게 “가장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할 때가 아니면, 도대체 언제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하며 역사 앞에 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밖에 짤막한 추리소설의 묘미를 맞보게 해 준 <레귤러>는 글 중반에 달궈진 머리를 식혀주는 감로수 같은 단편이다.

맛있는 과자들이 한 데 포장되어 하나씩 하나씩 포장을 벗길 때 마다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한 그 옛날 과자종합셋트마냥 보석 같은 단편 14개는 저마다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해 책 하나로 여러 권을 읽은 호사를 누린 듯하다.

 다채로운 저자의 이력처럼 소송, 탐정에서 우주여행과 첨단의 생체의학까지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아직은 아날로그적 감성에 눈이 더 가고, 그렇기에 <종이박물관>, <파자점술사>, <모노노아와레>속의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준 등장인물이 독감으로 인해 해롱거리는 머릿속에서도 긴 여운을 남긴다.

  좋은 경험이었다. 단편에 대한 불치의 선입견을 날려버린 각 작품의 수준도 그렇거니와 기대치 않은 SF소설에서 인간과 역사에 대한 Insight를 얻은 점에서 애장서가 될 것 같다.

Ken Liu의 다음 장편 <민들레 왕조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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