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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중력에 맞서 - 과학이 내게 알려준 삶의 가치에 대하여
정인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이 책은 딱딱한 과학 얘기를 한다. 그런데 그게 삶의 가치와 연결된다. 참 특이한 지점이다. 공식이나 수치로만 생각했던 과학에 살아가고 사랑하고 인격을 형성하고 늙어 죽어가는 인생의 가치에 대한 무서운 통찰이 숨어있을 줄이야!
책장을 넘기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면 이렇다. 누군가에게 용기를 준다면서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다’고들 한다. 부모나 교사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런데 맞는 얘길까? 과학의 시선으로 보면 사람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도 다르고 후천적인 환경의 불평등까지 존재한다. 매몰찬 얘기지만 듣고 보면 맞는 말이다. 그래서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얘기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게 뭔지 찾는 것, 그게 핵심이란 얘기다. 돌직구 한 방에 고민이 순식간에 해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바로 과학의 힘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숙독하게 됐다.
놀라운 건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70여 권의 과학책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부끄럽게도 내가 읽은 책은 소개된 책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슐리 르귄처럼 내가 좋아하는 SF 작가가 거론될 때, 왠지 취향의 공통점을 찾은 듯 해 반가웠다. 그중에 소개된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는 나 역시 흥미롭게 본 책이었다. 4시간이던가? 오랜 시간의 독서 끝에 내가 얻은 교훈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는 것, 그게 중년 이후의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만드는 길이란 비밀의 발견이었다.
사실 며칠 전 점심으로 뭘 먹었나 물으면, 기억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기억은 덧입혀지며 희미해진다. 그래서 기억 속에서 쉽게 사라진다. 하지만 부모님과 처음 외식하던 날이랄지, 사랑에 빠졌던 이와 함께 했던 식사, 엄청난 아픔을 겪었던 날 꾸역꾸역 먹었던 밥은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류의 새로운 경험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이 차이가 바로 노년의 시간이 빨리 흘러버리는 이유다. 노년의 반복되는 일상에선 기억나는 일이 줄고, 때문에 시간만 쏜살같이 흘러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조금 천천히 흐르게 하려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일들로 시간을 채워야 한다. 몇 시간을 써서 얻은 이 결론을 저자는 10 페이지에 충분히 깨닫도록 요약해준다. 덕분에 쉽게 핵심에 다다를 수 있다. 그것도 70여 권의 어려운 책들을. 효용의 관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난 더 중요한 걸 발견했다. 바로 과학저술가 정인경 씨의 시선이 매우 인간적이란 점이다. 그게 과학책을 통해 삶의 가치를 연결시켜냔 힘의 원천으로 이해된다. 같은 책을 보면서도 어디에 집중하고 무엇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읽는 이에 달린 문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익히 아는 코로나 펜데믹을 생각해보자. 처음엔 무증상 감염은 없다는 게 과학계의 정설이었다. 공기 감염도 불가능하다고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린 모두 안다. 모두 가능하다는 것을. 결국 과학의 가치는 이렇게 ‘틀림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두가 맞다고 생각하는 데 대해 회의하고 성찰하는 것, 도전하는 것 그게 답인 것이다. 인생에 주는 놀라운 충고다.
저자는 <호흡 공동체>란 책을 소개하면서 콜센터 노동자들의 집단감염 얘기를 건네준다. 한 사람이 감염되자 모두가 감염돼 버린 콜센터 노동자들. 그들은 밀폐된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일해야 했다. 그래서 집단감염으로 쉽게 이어진 것이다. 여기까진 잘 알려진 얘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에겐 층간 전파가 일어나지 않았다. 쉬는 시간 동안 다른 층으로 이동할 여유가 없어서 코로나 19 확산이 11층에서만 일어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긴가?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눈길을 주고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를 찾아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 다시 한번 공감한다.
사람답게 살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아프다 죽는다는 건 뭘까? 그 답을 찾는 여정에 길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