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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사벨
몽상퐁듀 지음 / 벨벳루즈 / 2018년 4월
평점 :
숨을 죽이며 기회를 기다리라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에 따라 이복 오라버니 엔리케의 뜻에 순응하며 인형처럼 살아온 카스티야의 왕녀 이사벨.
하지만 이사벨에게 끝내 기회는 오지 않았고, 엔리케에 의해 포르투갈의 왕 아폰수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서 폭력적인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게 됩니다.
이사벨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후회하며 삶을 돌이킬 수 있다면, 엔리케의 말 잘 듣는 인형으로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이사벨의 처절한 죽음이 안타까워서였을까요? 신은 그녀의 시간을 아폰수와 결혼하기 1년 전으로 돌려줍니다.
그렇게 마침내 운명을 바꿀 기회를 잡게 된 이사벨은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하는데...
여주가 회귀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소설이라고 하면 여주의 능력을 보여주는 뛰어난 활약과 사이다 전개를 기대하게 되는데요.
이사벨이 회귀 전과 달라지기는 하지만 제 기준에서는 크게 능력 발휘를 하지 못한 것으로 느껴져서 아쉬웠습니다.
예전의 삶처럼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기회를 만드리라 결심한 이사벨이 적극적으로 결혼 상대를 찾고, 엔리케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해 페르난도의 곁으로 도망가는 것 까지는 좋았어요.
그런데 도망가는 과정에서 경비병에게 수치스러운 성추행을 당하며 묵묵히 참는 것과 강제로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페르난도는 여자의 순결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사람 같았으니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도망가야 하는 입장이니 불필요한 마찰 없이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기는 하겠지만, 참고 넘어갈 수준이 아닌 성추행까지 감당할 필요는 없잖아요? 게다가 성폭행을 당할 순간이 와도 견디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것도 답답했어요. 페르난도가 어떻게 생각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인데 지키려는 노력은 해야죠...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도망친다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는 전혀 다른 소극적인 이사벨의 태도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서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나마 페르난도와 결혼하고 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사벨이 조금씩 자신이 힘으로 인생을 바꿔나가기 시작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려는 모습을 보여서 이사벨의 활약을 기대했던 저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네요.
그에 비해 난봉꾼에 믿음직하지 못한 첫인상으로 실망을 줬던 페르난도는 대놓고 나서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사벨을 지지하고 도와줘서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흔히 남편은 ‘남의 편이라 남편’이라고들 하잖아요? 근데 페르난도는 언제, 어디서나 이사벨의 편을 들어주고 그녀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줘서 저에게 감동을 줬어요.
첫눈에 이사벨에게 반했다며 “나를 마음껏 이용해요. 이용당해도 좋을 정도로 그대에게 반했으니.” 이런 말을 했던 초반에는 바람둥이의 가벼운 말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요.
단순히 이사벨에게 다정하고 좋은 남편이 되어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되겠다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고, 이사벨이 여자라는 것에 편견을 가지지 않고 끝까지 그녀를 지지해주는 깨어있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습니다.
왕이 되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사벨은 스스로 여자라는 틀에 갇혀 진전하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항상 페르난도가 등장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틀을 깨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주었죠.
이사벨은 예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엔리케에게서 도망쳤지만 ‘음전하고 값어치 높은 보석’으로 숨죽이며 자랐던 기억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이사벨이 조금씩 ‘인형 같은 공주’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곁에 페르난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여자를 그저 성적인 도구로만 생각하며 이사벨을 아폰수에게 팔았던 엔리케, 여자라는 이유로 동생인 알폰소를 지지했던 귀족들, 자신의 욕구를 푸는 수단으로 이사벨을 휘둘렀던 아폰수...
여자에 대한 편견과 무시로 가득했던 남자들과 페르난도의 깨어있는 생각과 행동들이 대비돼서 페르난도가 더욱 돋보였습니다.
실질적으로 나서서 일을 바로잡는 것은 이사벨이었지만 ‘외조란 이런 것이다’를 제대로 보여주는 페르난도의 배려가 인상적이라 기억에 남았어요. 복수에 있어서도 애매하게 복수를 끝낸 이사벨 대신 페르난도가 완벽하게 마무리를 해주기도 하고요.
회귀->복수->해피엔딩의 정석을 따라가는 전개라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스토리가 복잡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사 관련 내용 비중이 크지 않아서 무난하게 읽었어요.
다만, 복수의 과정이 작위적이고 이사벨의 능력보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 위주로 복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날림으로 결혼을 한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부부가 된 것을 인정받기 위한 과정이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복수는 후반부에 급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좀 허무했어요. 저처럼 사이다를 기대했던 분들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전의 삶에서는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 학대받던 이사벨이 남의 편이 아니라 ‘내 편’만 들어주는 훌륭한 남편을 만나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왕이 되는 과정이 훈훈해서 즐겁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