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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지하철 역 이정표 도난사건 – 이세벽, 굿북

이세벽님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사랑, 그리고 꽃들의 자살] 이후 두 번째다. 어른이 읽는 동화책 이라는 부재를 가진 그 책에서는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다음으로 접한 책이 바로 이 책인데 이세벽님은 아마도 이 책을 통해서 삶을 건축물에 비유하자면 “기초 공사를 잘 다져가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뜻함을 더해주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그 안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저자는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양심 세포를 자극시키면서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를 꿈꾸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책 초입에서 가볍게 보고 넘겨버린 질문 하나가 있었다.
빌딩과 초고층 아파트가 사람들이 꿈꾸어온 세상, 우리가 욕망의 바벨탑을 세워온 건 아닐까요. 욕망을 꿈이라 믿고 있고 욕망을 열정이라 착각하고 욕망을 희망이라 노래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7쪽. 지은이의 말 중)
이 말은 글이 전개 되어 갈수록 몇 번이고 되새김질해야 하는 문제점으로 남는다.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척도 역시 물질적인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행복의 척도란 ‘내가 가진 것이 타인의 것보다 더 낫다’ 라는 물질적인 비교와 상대평가적인 평가에서 우월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점이 있지 않았던가.

우리가 품은 행복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황금 쥐(마치 모 그룹총수를 연상시킴)가 가진 물질과 권력, 그와 결탁한 폭력배의 힘에 비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 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진 자들의 욕망은 나무라면서도 그들을 치장하고 있는 물질을 부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적 빈곤감은 더 가지야 한다는 욕심을 낳고 나의 꿈과 이상을 쫓기 보다는 흔히 잘나가는 직업을 얻기 위해 황금 같은 시간, 젊음을 허비해버리기 때문이다.
어느새 물질 이란 것은 제가 가져야 할 힘과 능력 이상으로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우리가 가야 할 꿈과 희망의 이정표를 도난 당해버린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의 척도는 무엇일까. 난 이 말에서 한 가닥, 희망을 잡아간다.
꿈이 있는 사람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가난이나 고통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아. 그들에게 삶은 자유와 진리를 찾는 여행이지 .215쪽
당장에 아이들 학원비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하는 30대 후반에 가장으로서는 회의적인 소리다. 하지만, 꿈과 희망 없이 호구지책, 타인이 정해둔 길을 답습하듯 따라가는 내 삶 역시 그리 대단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현실의 삶은 살아가는 흉내를 내는 것이지 꿈과 희망을 위해 살아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의 권태로움도 목적의식이 희박해져서 오는 것은 아닐는지. 내가 정말로 원해서 가는 길이라면 지금처럼 무료해하거나 쉽게 지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을 내 삶에 U-턴을 알리는 이정표로 삼아보았다.
운명 따위는 없다. 저주와 축복이 절제와 무절제로 선택되듯이 운명도 그럴 것이다. (중략) 지금은 꿈과 희망을 선택할 때이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것이 내가 결정한 운명이다. 289쪽
책에서 말하는 꿈과 희망의 발전소, 그 스위치는 언제나 내 속에 있지 않았던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 잊고 있었던 나의 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원 스위치를 힘껏 밀어 올리는 일이다.

[책 속으로]
이 책은 등장인물 설정에 저자 나름에 의미를 둔 것 같다. 어린 철수와 기성세대 부장판사.
성경에 한 구절이 생각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잘 3절)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신은 인간을 만들고 ‘양심’이라는 유일한 감정 하나를 선물로 주시지 않았을까 라고.
그 양심의 상태가 가장 총총한 열 세 살 철수와 이성과 지혜의 상징인 부장판사. 이들이 서로 손을 잡아야만 꿈과 희망 발전소로 갈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우리가 찾아야 할 인간성은 아닐까.
어린아이와 같은 양심과 지각(知覺)있는 행동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적인 인물 설정이었다고 생각된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장판사의 집을 시작으로 우체통 이야기, 꿈과 희망 발전소를 찾아가는 내용은 다소 몽환적이면서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굳이 황금 쥐가 하는 말에 기역 니은 받침 대신 이응 자를 써야만 했을까. 쉽게 읽히지가 않아 다시 보게 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 책을 덮으며 두 사람이 생각났다. 한 사람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자신의 재산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돈 까지 빌려 부동산 사업에 투자했던 친구와 재개발 지역에 무리하게 투자했던 지인이다. 지금 그 두 사람 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처음 자신만만했던 그 모습은 금액이 큰 만큼 한동안은 찾아 보기 힘들 것 같다. 그들 마음에 동요가 사라질 때 즈음 힘내라는 소주 한잔 보다는 이 책을 선물해 주고 싶다.
아마 이 책이라면 그들 가슴에 내가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조용히 놓아두고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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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평전 - 자유로운 사유를 위한 이드의 종교비평
이드 지음 / 종교와비평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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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평전 – 이드, 종교와 비평

처음 책 제목을 보았을 때는 예수의 일생을 드라마와 같은 재미를 살려 쓴 책 일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책에 2부 까지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3부로 넘어가면서 내심 ‘벤허’의 작가 루 웰레스의 일화처럼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가 ‘기독교의 신화를 영원히 없애버릴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책을 쓰던 중 그리스도의 신성함에 무릎을 꿇었다는 일이 생각나서였다. 그러나 저자 이드 님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 재림에 이르기 까지 성경 구절을 찾고 관련 자료를 들춰가며 의문점들을 파헤쳐나간다.
글 첫 머리에 이 책을 쓴 목적이 ‘바이블과 예수를 우상화하여 부와 명예, 권력을 추구하고 종교 사업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예수를 기존 잣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쓴 글이다’ 고 밝히고 있다.
그런 그의 역설과 주장은 성경 구절과 신문, 특정 종교인의 말과 글들을 인용하여 신빙성을 더한다. 많은 자료 수집과 학습의 시간이 있었음이 역력해 보였다.

저자 이드 님의 발상은 또한 참으로 재미있고 일리가 있다.
“예수가 이 지구촌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인류 모두가 죄인이라고 선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류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라는 역설이 성립되는 게 예수의 죄에 대한 견해다. 예수가 있는 곳 혹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겐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겠으나 예수를 부정하거나 아예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P-41)
나 역시 이 말에 크게 공감했다. 왜 왔을까? 누가 속죄양이 되어달라고 요청 이라도 했나?
책 전체가 예수를 신랄하게 비평하면서 통쾌하리만치 까발리고 벌겨 벗겨 놓는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움이 있다.
먼저, 179 쪽부터 181쪽에 이단의 목록이 나온다. 저자 이드 님은 소시민의 시각으로 이 책을 썼다고 서두에 밝히면서 예전에 종교생활을 했다가 종교의 폐단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기독교가 인류에 끼친 죄악사를 말하는 전도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 역시 기독교를 믿어 본적이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은 없다. 돈도 권력도 밝히지 않았고 신앙인일지언정 그 이면에 잠재되어 있을 인간의 욕망을 본적이 없는 터라 이단을 열거했던 그의 글은 그로 하여금 이단의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은 일부 더러운 짓을 일삼는 이단들로 인해 선량한 기독교인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이며 저자 역시 좋은 않은 오명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예수를 호래자식, 사기꾼, 동성애자, 강간설, 빈약한 경제관 등으로 표현하면서 골고다에서 예수를 찔렀던 로마병정들의 날카로운 창 끝과 같은 말을 써야만 했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요즘 모 개그프로에 나오는 ‘왕비호’와 같은 의도적인 비호감 전략이라면 모를까.

저자 이드 님은 철학, 신학, 인문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성경 해석에 미흡함이 엿보인다. 특히 '팔복'을 비난하는 부분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라는 뜻을 그저 ‘the poor spirited’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은 아닌지. 가난한 마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인데 그 속을 물질로만 가득 채우지 못한 빈곤함만을 생각한 것은 아닌지.
실제로 예수와 접촉해서 예수의 말을 옮겨 적은 글은 마태와 마가 복음서다. 그 외 대부분은 들은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옮겨 적은 것이라 성경 기록 자체의 모순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성경을 토막 구절로 이해하려 든다는 것도 상식 밖의 일이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신학대학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말도 앞뒤 다 잘라 먹고 중간만 들으면 안되듯이 말이다.

처음 예수를 기존 잣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쓴 글이라는 그의 의도는 제대로 표현되고 먹힌 듯 하다.
하지만 마치 ‘억울한 기독교인’들을 대표해서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 이런 글을 썼다는 식의 마지막 구절에 대해서는 역시 아쉽다.
마약 이드님의 말이 맞다 면 한평생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간 테레사 수녀나 김수환 추기경, 지금도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변 묻은 몸을 씻기며 죽는 날을 기다리는 우리 목사님은 (나 역시 사이비 신자지만) 이드 님의 표현만큼 또 얼마나 억울할까.

종교를 믿음에 있어 신과 나 사이에 그 어떤 장애가 있어서도 안 된다. 흔히 목사를 양떼를 이끄는 목자에 비유하는데 그들은 신자들이 신앙의 본질을 오류 없이 바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지 그 외 어떤 입장에서건 사람 이상의 신분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의 입장은 단지 수도자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말씀을 듣고 자라는 신자들이 자신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순수한 신앙을 바라 볼 수 있도록 해야지 목사나 신부를 쫓아 닮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면 잘못 가르쳤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분별력 없이 이단에 빠질까. 강제성을 띄는 것도 아니고 헌금을 많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나처럼 봉사하는 것이 싫어서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이 책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렇게 여러 각도의 시각에서도 바라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한다면 아마도 재미있는 화제 거리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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