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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장으로 -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채굴장으로 - 이노우에 아레노/시공사
무슨 일이 생길 법도, 한데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는데, 왜 세이 와 이사와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는 것일까.
예전에는 잘된 작품의 기준이 눈물과 감동이었다면 요즘은 ‘자극’적인 것이 더 극적인 것으로 간주 되곤 한다. 그에 비하면 [채굴장으로]의 결말은 어쩌면 너무도 밋밋하다. 어쩌면‘막장’이라는 말이 유행이 되어버릴 만큼 나의 감각이 너무 강한 자극에 길들여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채굴장으로]는 통속적인 연애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아주 멀다. 섬 이라는 고립된 배경에 새로 부임해온 젊은 남자 음악 선생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여심을 잘 표현한 책이다.
주인공 세이는 인정 많고 호기심 많으면서도 겁이 많은 여성이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관심이 가는 남자 앞에서는 그저 마음의 곁눈질 밖에 할 수 없었으리라.
사랑이 그냥 오는 법이 있으랴. 쳐다봐야 관심이 가고 관심이 가야 애정의 싹이 트는 것을. 젊은 음악 선생인 이사와 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그녀의 사랑표현법은 그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저 바라보기만한 이 사랑을 두고 왜 굳이 ‘채굴장’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터널을 파나갈 때 제일 끝에 있는 지점을 채굴장이라고 합니더. 터널이 뚫리면 채굴장은 없어지지만, 계속 파는 동안은 언제나 그 끝이 채굴장이지예’@ 258쪽
나름 유추해보면 이렇다. 사람의 일은 거의가 유효기간이 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을 것이다. [채굴장에서] 의 부적절해 보이는 사랑 역시 그 사랑이 진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채굴장(유효기간)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터널이 뚫리고 나면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사랑할 때는 활기를 띈 채굴장의 모습이지만 유효기간이 지나고 나면 사랑도 인연도 소멸되는 것. 돌아가야 할 자리가 분명한 ‘세이’가 그 곳에서 주웠던 나뭇조각 십자가를 흙에 묻듯이 조용히 가슴에 묻어야만 할 사랑인 것이다.
유부남를 사랑하면서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쓰키에.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그와 잠자리한 이사와 를 보면서 ‘사람의 사이는 어쩌면 비밀의 끈으로 엮여있을지 몰라’ 라며 재미 있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즈카 할머니가 음몽하며 불렀던 요시하루는 정말 남편 이름인지’ 라는 대목에서는 영화 Before sunrise 셀린느의 할머니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그녀의 할머니는 오랜 세월 수절했지만 그 가슴속에는 평생 다른 남자를 품고 살았다는 이야기.. 사랑, 정말 알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책 곳곳에 숨어있는 이노우에 아레노 의 맛깔스런 표현에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감성을 잘 이해하는 작가인 것 같다. 풍경 묘사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은 분명 그런 생각을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1독후의 뒷맛이 개운하지 못하다. 사랑이 끝나버린 후의 풍경을 그린 것 같아서다. 아니면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린 탓인가. 아무튼 내게 있어서는 ‘가을을 연상케 하는 책’이었다.
이미 결혼을 한 몸으로 무슨 사랑 타령일까. 좋은 시 한편이 있어 놓고 간다.
– 법정, 미움도 괴롭고 사랑도 괴롭다 중에서.
사랑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된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 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