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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양산
마쓰다 마사타카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바다와 양산 서평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도 지하철 안에서 책을 다 읽은 이후에 말입니다. 다 큰 남자가 지하철 안에서 혼자 조용히 눈물을 훔치다니..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는 눈물을 흘릴만한 그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느낀 점은, ‘정말 아무런 내용이 없는 무미건조한 책이다.’ 라는 점입니다. 희곡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중세 고전 희곡들을 재미있게 보았던 저로서는 도무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더군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 희곡들은 대부분 ‘발단-전개-절정-하강-대단원’ 으로 이루어진 반면, 이 희곡에서는 ‘하강-대단원’ 밖에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재미가 없었나 봅니다.
마침 간송미술관이 27일까지 외부에 공개한다는 것을 듣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에 다시 한 번 읽기로 하고, 가방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먼저 읽었던 책은 ‘조선의 사랑’ 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에서부터 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예민한 소재에 관한 책을 읽고서 다시 한 번 ‘바다와 양산’ 을 읽게 되었습니다.
첫 페이지를 여면서부터, 책의 맨 앞장을 보면서부터(앞날개) 무언가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 무언가 놓쳤다는 느낌. 그랬습니다. 이전에 저는 책을 보는데 중요한 ‘마음’ 을 놓고 바다와 양산을 읽은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돈오(頓悟)의 순간이 저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전에 단조롭다고 느낀 그 내용들이, 재미없다고 느꼈던 그 내용들이 하나하나가 제 마음속에 파고들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한 여자의 일상생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 아무것도 모르는 옆집과, 사정을 알면서도 조용히 지나치는 잡지사의 기자. 이 모든 것이 저에게 하나의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왜일까요. 일본 소설 중에는 시한부를 앞둔 사람을 그리는 소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역시 그런 소설이지요. 하지만 ‘바다와 양산’에서 느낀 감정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 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간결한, 그리고 여백의 미가...
희곡은 상황설명을 하기 위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이미 일간의 줄거리를 알고 공연장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리고 잡다한 설명은 배경으로 처리합니다. 배경 역시 희곡의 한 축을 담당하니까요. 하지만 ‘바다와 양산’ 은 다릅니다. 배경이라고는 한 집안의 거실(茶の 間 - 흔히 차를 다시는 곳)이 전부이지요. 하지만 이 거실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대사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말줄임표로 가득찬 희곡의 대본. 하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보는 사람에게 무한한 감동과, 슬픔을 몰려오게 합니다.
말줄임표가 무엇이 대수냐구요? 아닙니다. 이 역시 뛰어난 의견 전달의 한 방법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말을 줄입니까?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지는 않으십니까? 말이라는 것은 절제가 있기에 멋있는 법이지요. 여운이라는 말의 탄생 역시 그래서 된 것이구요.
사실 말줄임표는 현대 인간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말을 줄인다는 것은 바로 감정 표현에 서툴다, 혹은 감정 표현을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귀결 될 수 있습니다. 작가 역시 그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일까요. 두 주인공, 요지와 나오코가 이러한 말줄임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극중 요지는 결코 감정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아주 조용히, 아주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지요. 요지의 말줄임표 속에는 크게 두 가지가 묻어있습니다. 표현을 하고 싶은데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아쉬움. 그리고 나오코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툰 감정표현. 부인이 죽었을 때도 요지는 담담합니다. 하지만 남겨진 요지의 행동에서 우리는 나오코에 대한 사랑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지요.
나오코는 어떨까요. 나오코의 말줄임표에서도 우리는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남겨질 자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미안함. 나오코는 마지막 순간의 바로 앞까지 결코 울지 않습니다. 자신이 힘듬에도 요지에게 무언가를 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밥 한 끼라도 더 만들어 주고 싶어 하였던 나오코의 마음. 그리고 다른 여자라도 근근히 방문하라고 하는 대목에서 보여지는 요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5막의 장면은 이러한 말줄임표를 극대화시켜 보여줍니다. 무지개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 나오코가 무지개 안에 서 있다고 하자,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요지. 하지만 나오코 만큼은 보인다고 하면서 나오코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요지. 나오코는 웃고, 정말 천진난만하게 웃고,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부탁을 함과 동시에, 막은 내려집니다.
제가 운 것은 바로 저 장면이었지요.
맨 첫 장에 적혀있었던 글귀가 생각나시나요? “태어나는 일도 죽는 일도 어떤 먼 곳에서 오는 인간에 대한 복수일지 모른다. 분명 그렇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그 복수가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 얽힌 한 쌍의 그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라는 글귀가. 이제야 이 글귀가 머릿속에 와 닿더군요. 하지만 이 글귀로 끝내면 안 됩니다. 책 앞날개와 희곡 마지막에 쓰여진 글귀를 한번 읽어보세요. “....아마도, 라고 나는 생각한다. 먼 곳에서 오는 복수와는 또 다른 기원을 갖는 먼 곳에서 오는 전별(餞別)이 있었던 것이라고...” 이 두 글귀를 이해하게 되자, 도무지 울음을 주체할 수 없더군요. 슬픈 이야기이지요. 너무나도 슬픈. 이별을 전별이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슬픔...
얼마전 인터넷에서는 한 제비(까치?)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책으로는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라는 책이 있지요. 이 두 책에서 나온 야생동물들의 사랑이야기가 ‘바다와 양산’ 과 같이 투영되더군요. 바다의 양산에서 느껴지는 그 사랑, 근원적인 사랑은, 우리가 문명시대에서 잊고 있었던 근원적인 야생동물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얼마 전 이 희곡을 원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바다와 양산’ 에 관한 희곡이 무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연극으로 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희곡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고, 책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을 겁니다. 사실 즐거움이라는 말보다는 슬픔이라는 말이 올바른 말이겠지요. 요즘 눈물이 부족하시다거나, 곁에 사랑 때문에 힘든 사람이 있을 때 조용히 이 책을 선물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얇은 책이지만, 그것이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데 그지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느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