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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베쓰야쿠 미노루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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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하여 이바구('이야기'의 방언)를 하기 전에, 일단 '편력' 이 무엇인지 부터 알려드리지요. 막상' 편력'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알기 힘든 것이 사실이니까요.
 

편력 [遍歷][명사] 1 이곳저곳을 널리 돌아다님. ≒천력(踐歷)·편답(遍踏)·편순(遍巡). 2 여러 가지 경험을 함.
 
 이제 편력이란 뜻을 잘 알았으리라 생각하며.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 보고록 하겠습니다.
 
이 책에 대한 내용은 여러 후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느껴지는 내용에 대해서 써 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라서요..
 
 이 책의 가장 큰 중심 축은 '두 기사' 가 벌이는 '살인' 입니다. 살인을 이들의 살인에 대하여 여러 평론가들은 '죽지 않기 위해 싸운다' 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러면서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냉혹한 조소' 라는 표현까지도 쓴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결코 두 기사들은 '살인'을 의도적으로 하려하기 보다는,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의심'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살인' 은 주위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야 끝나고 말지요. 비극적으로 말이지요.
 
 이에 대하여, 많은 독자들은, 기사가 나쁜놈이니, 죽은 사람들이 바보니, 하는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들이 무척 가련합니다. 사실 이들은 '죽기 안달이 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죽지못해 살고' 있습니다. 처음 이러한 느낌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이들이 '처녀' 에게 죽임을 당하려는 장면이었습니다.
 
기사 2 : 괜찮지... 나는 이제, 내 분별력에 넌더리가 나... 모험의 여행은 끝났어. 이번에야말로 저 아이가 부르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계략에 속아서 침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목을 내줘야지.
 
 기사2는 처녀에게 자신의 목숨을 주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을 죽여왔던 그의 행동과는 반대로 말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죽은 뒤, 이들이 하는 소리는 '죽지 못해 산다' 라고 하는 제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 주었죠.
 
 
기사2 : 아무 일도 없지 않은가...
기사1 : 아무 일도 없군.
기사2 : 당신, 뭔가 해둔 거 아니었나?
기사1 :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기사2 : 그럼, 왜 고르라고 했지?
기사1 : 어쩌면 저 아이가 뭔가 해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기사 2는 기사1이 음식에 무엇인가를 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음식을 먹습니다. 사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태연히 독이 담겨있는 음식을 먹은 것이지요. 하지만 기사2가 죽음을 맞이하려고 하였지만, 기사1은 그러한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기사2 : 날 죽일 생각이 없군...
기사1 : 없어.
기사2 : 왜?
기사1 : 이제 질렸어.
기사2 : 죽이는 게 말인가?
기사1 : 사는게.. 그래서 사는 일에 질리니까 죽이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어...
 
 기사1은 '삶' 에 질려서 '살인'을 하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앞에서는 분명히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굳이 그 사람들을 죽일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려봅니다. 사실 이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죽음' 입니다. 이들은 서로 '죽음'을 원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같이 여행을 해 온 만큼 서로간에는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타인(他人)은 다르지요. 얼마든지 이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해야할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이 두 기사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기본적으로는) '착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 두 기사를 죽이지 못하지요. 결국, 이 두사는 '자신들을 죽이지 못하는 데에 대한 분노' 가 중심이 되어 주위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죽여주지도 못하는 자들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이 그 밑에 깔려 있지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이들은, 주위 모든 사람이 죽자. 다시 허무하게 앉아서, 자신들을 죽여줄 상대를 기다립니다.
 
기사1 : 어쩔 수 없지.
기사2 : 언제까지지?
기사1 : 저쪽에서 올 때까지지.
기사2 : 뭐가...?
기사1 : 우릴 죽일 상대가 말이야.
기사2 : 올까..?
기사1 : 기다리는거지...
 
 결국 이들은 또다시 자신들을 죽여줄 상대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지치면 다시 여행을 떠나겠지요. 자신을 죽여줄 상대를 찾아서 말이죠.
 
 사실, 이러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물론 불쌍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개죽음' 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죽음은, 두 기사에게 있어서는 '정말 바라던 바로 그 죽음' 입니다. 두 기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가질 수 없었던 영원한 안식을 선사해 줍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러한 죽음을 이루지 못하였죠.
 
 요즘 세상, 정말로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OECD국가 중에 자살률 1위를 당당히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날로 우울증 환자는 늘어나고 있고, 결국 '자살 카페' 까지 생겨가며 서로가 서로를 죽여주려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어찌보면, '두기사이야기' 와도 연관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이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다가, 한번 용기를 내서 죽어보려고 하지요. 결국 그들중 누군가는 '자신들이 바라않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 외에는 '자신들이 원하지 않던' 삶을 다시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다시 한번 '자신들이 원하는' 죽음을 얻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두 기사가 원했던 바로 그곳, 즉, 인간에게 있어서 최종적으로 쉴 수 있는 곳이 '죽음' 이라는 것에 대하여 어느정도 수긍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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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선과 귀신 이야기
임방 지음, 정환국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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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는 이매망량(魑魅魍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말로서, 이(魑)는 산에서 나오는 도깨비 ,매(魅)는 집에서 나오는 도깨비이고, 망량(魍魎)은 나무와 돌의 정령을 칭하는 말입니다.. 이외에도 발(魃 - 가뭄을 일으키는 귀신), 산매(魑魅: 네 발 가진 도깨비)등 귀신에 관한 명칭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서양은 어떨까요. Ghost와 Phantom이 있지만, 그나마 phantom은 ‘귀신’ 이라는 뜻보다는 ‘환영’ 이라는 뜻으로 쓰여지는 말입니다. 어째서 서양에서 간단히 말하여지는 귀신을, 동양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 가면서 말하는 걸까요.

이는 동, 서양의 귀신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흔히들 서양은 귀신을 나쁜 존재로 보는 반면(캐스퍼는 제외하도록 하지요. 캐스퍼도 정확히 하자면 귀신이 아니라 백(魄)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동양은 귀신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희노애락을 가진 존재로서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인식합니다. (장화홍련전에서 두 자매가 울면서 고을 사또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이런 부분의 일환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제가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조선의 신선과 귀신 이야기’ 역시 충분히 이러한 동양적 귀신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은 ‘귀신에 관한 이야기’ 를 포커스로 맞추지 않고, ‘귀신을 만난 사람들’ 에 관하여 포커스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동양적 귀신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귀신을 두려워 하는 존재만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귀신에게 홀리는 것을 뛰어넘어 오히려 귀신을 부리고(使役),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등, 귀신을 자연에 속하는 한가지 존재로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야 말로 진정한 동양적 귀신관이 아닐까요!



 이제 신선으로 시선을 돌려보지요. 이 책에는 귀신뿐만이 아니라 신선도 나오니 말입니. 신선관 역시 동, 서양의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 천계(天界)는 뭐니뭐니해도 ‘하나님’ 을 중심으로 세워진 ‘천당’ 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밑에 존재하는 천사는 각각의 임무와, 계급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세하게는 권(權), 능(能), 력(力), 주(主), 좌(座), 지(智), 치(熾)의 7천사, 이 밑으로는 2계급의 하급 천사가 있습니다.(흔히 우리가 부르는 Angel 은 이러한 하급천사를 이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동양의 천계관(天界觀)은 약간 다릅니다. 동양에도 그 정점에는 천제(天帝 - 흔히들 옥황상제(玉皇上帝)라 부르는)가 있지만, 그조차도 여러 신선들에게 뽑힘을 받은 자가 상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 밑에서 일을 담당하고 있는 신선들 역시 각각의 개성을 지니며 상제에게 반(反)하기도 하며 철저히 자신들의 일에만 몰두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양적 천계관은 피라미드 조직, 동양적 천계관은 점조직 정도로 정의내릴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동양적인 신선관도 드러냅니다. 철저한 점조직인 신선의 생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고, 영향을 받으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절대자(絶對者)가 아닌 초월자(超越者)로서의 역할. 장난도 치고, 자신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거침없는 언행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신선에 대하여 범인(凡人)들은 경배하며 ‘기인이사(奇人異士)’ 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 이러한 기인들은 범인들에게 조그마한 인덕을 베푸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범인들 또한 이러한 인덕에 은덕으로 보답하며 칭송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그 경계를 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동양의 신선관입니다.

 

 저는 이러한 동양에 태어난 것이 너무도 기분이 좋습니다. 동양에서 밖에 느낄수 없는 즐거움들, 동양적인 자연관들, 동양적인 신선들, 동양적인 귀신들. 서양의 자본주의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에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아련한 감정들을, 동양의 서적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여름에, 조선의 신선과 귀신 이야기로 이러한 감정을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요. 너무도 각박해져 있는 우리의 마음을 조금 다스리는데는 충분한 거리가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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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
이덕형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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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그 숨겨진 이면과의 대화.

 흔히들 말하여지는 소위 '잘 팔리는' 책이 아닌 비잔티움 문화 속에 담겨진 '역사적, 철학적, 종교적' 이면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학술서로서도 뛰어날 뿐더러, 교양서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더 자세한 서평은

 http://cafe.naver.com/skkup/68

 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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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양산
마쓰다 마사타카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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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양산 서평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도 지하철 안에서 책을 다 읽은 이후에 말입니다. 다 큰 남자가 지하철 안에서 혼자 조용히 눈물을 훔치다니..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는 눈물을 흘릴만한 그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느낀 점은, ‘정말 아무런 내용이 없는 무미건조한 책이다.’ 라는 점입니다. 희곡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중세 고전 희곡들을 재미있게 보았던 저로서는 도무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더군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 희곡들은 대부분 ‘발단-전개-절정-하강-대단원’ 으로 이루어진 반면, 이 희곡에서는 ‘하강-대단원’ 밖에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재미가 없었나 봅니다.

 마침 간송미술관이 27일까지 외부에 공개한다는 것을 듣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에 다시 한 번 읽기로 하고, 가방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먼저 읽었던 책은 ‘조선의 사랑’ 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에서부터 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예민한 소재에 관한 책을 읽고서 다시 한 번 ‘바다와 양산’ 을 읽게 되었습니다.

첫 페이지를 여면서부터, 책의 맨 앞장을 보면서부터(앞날개) 무언가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 무언가 놓쳤다는 느낌. 그랬습니다. 이전에 저는 책을 보는데 중요한 ‘마음’ 을 놓고 바다와 양산을 읽은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돈오(頓悟)의 순간이 저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전에 단조롭다고 느낀 그 내용들이, 재미없다고 느꼈던 그 내용들이 하나하나가 제 마음속에 파고들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한 여자의 일상생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 아무것도 모르는 옆집과, 사정을 알면서도 조용히 지나치는 잡지사의 기자. 이 모든 것이 저에게 하나의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왜일까요. 일본 소설 중에는 시한부를 앞둔 사람을 그리는 소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역시 그런 소설이지요. 하지만 ‘바다와 양산’에서 느낀 감정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 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간결한, 그리고 여백의 미가...

희곡은 상황설명을 하기 위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이미 일간의 줄거리를 알고 공연장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리고 잡다한 설명은 배경으로 처리합니다. 배경 역시 희곡의 한 축을 담당하니까요. 하지만 ‘바다와 양산’ 은 다릅니다. 배경이라고는 한 집안의 거실(茶の 間 - 흔히 차를 다시는 곳)이 전부이지요. 하지만 이 거실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대사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말줄임표로 가득찬 희곡의 대본. 하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보는 사람에게 무한한 감동과, 슬픔을 몰려오게 합니다.

말줄임표가 무엇이 대수냐구요? 아닙니다. 이 역시 뛰어난 의견 전달의 한 방법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말을 줄입니까?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지는 않으십니까? 말이라는 것은 절제가 있기에 멋있는 법이지요. 여운이라는 말의 탄생 역시 그래서 된 것이구요.

사실 말줄임표는 현대 인간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말을 줄인다는 것은 바로 감정 표현에 서툴다, 혹은 감정 표현을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귀결 될 수 있습니다. 작가 역시 그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일까요. 두 주인공, 요지와 나오코가 이러한 말줄임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극중 요지는 결코 감정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아주 조용히, 아주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지요. 요지의 말줄임표 속에는 크게 두 가지가 묻어있습니다. 표현을 하고 싶은데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아쉬움. 그리고 나오코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툰 감정표현. 부인이 죽었을 때도 요지는 담담합니다. 하지만 남겨진 요지의 행동에서 우리는 나오코에 대한 사랑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지요.

나오코는 어떨까요. 나오코의 말줄임표에서도 우리는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남겨질 자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미안함. 나오코는 마지막 순간의 바로 앞까지 결코 울지 않습니다. 자신이 힘듬에도 요지에게 무언가를 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밥 한 끼라도 더 만들어 주고 싶어 하였던 나오코의 마음. 그리고 다른 여자라도 근근히 방문하라고 하는 대목에서 보여지는 요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5막의 장면은 이러한 말줄임표를 극대화시켜 보여줍니다. 무지개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 나오코가 무지개 안에 서 있다고 하자,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요지. 하지만 나오코 만큼은 보인다고 하면서 나오코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요지. 나오코는 웃고, 정말 천진난만하게 웃고,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부탁을 함과 동시에, 막은 내려집니다.

제가 운 것은 바로 저 장면이었지요.

맨 첫 장에 적혀있었던 글귀가 생각나시나요? “태어나는 일도 죽는 일도 어떤 먼 곳에서 오는 인간에 대한 복수일지 모른다. 분명 그렇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그 복수가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 얽힌 한 쌍의 그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라는 글귀가. 이제야 이 글귀가 머릿속에 와 닿더군요. 하지만 이 글귀로 끝내면 안 됩니다. 책 앞날개와 희곡 마지막에 쓰여진 글귀를 한번 읽어보세요. “....아마도, 라고 나는 생각한다. 먼 곳에서 오는 복수와는 또 다른 기원을 갖는 먼 곳에서 오는 전별(餞別)이 있었던 것이라고...” 이 두 글귀를 이해하게 되자, 도무지 울음을 주체할 수 없더군요. 슬픈 이야기이지요. 너무나도 슬픈. 이별을 전별이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슬픔...

얼마전 인터넷에서는 한 제비(까치?)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책으로는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라는 책이 있지요. 이 두 책에서 나온 야생동물들의 사랑이야기가 ‘바다와 양산’ 과 같이 투영되더군요. 바다의 양산에서 느껴지는 그 사랑, 근원적인 사랑은, 우리가 문명시대에서 잊고 있었던 근원적인 야생동물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얼마 전 이 희곡을 원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바다와 양산’ 에 관한 희곡이 무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연극으로 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희곡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고, 책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을 겁니다. 사실 즐거움이라는 말보다는 슬픔이라는 말이 올바른 말이겠지요. 요즘 눈물이 부족하시다거나, 곁에 사랑 때문에 힘든 사람이 있을 때 조용히 이 책을 선물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얇은 책이지만, 그것이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데 그지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느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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