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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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이하 하루키 선생)만큼 국내에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외국 작가가 있을까 싶다. 2000년대 초반 모 CF에서 《노르웨이의 숲》이 등장하고 난 후 국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이지수의 《아무튼, 하루키》에서 밝히고 있듯 사실 그 전에도 PC 통신을 통해 국내에 많은 하루키 선생의 팬들이 그에 대한 연모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하루키 선생 소설의 섬세한 인물 묘사와 생활의 모습에 매료되면서, 그의 소설에서 인용하는 다양한 재즈와 클래식, 위스키 등 소위 상류의 문화에 빠져들게 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같은 에세이에서 밝히고 있듯, 하루키 선생은 상당한 달리기 매니아이기도 하다. 하루키 선생은 매일 정해진 패턴대로 생활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매일 10키로 러닝을 하고 정해진 분량의 소설을 쓰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이다. 그런 그의 생활 방식은 이른바 하루키 매니아의 생활 방식 자체를 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작가를 초월하여 하나의 현상이다.

  그런 하루키 선생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지난 4월 13일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의 장편소설이고, 《기사단장 죽이기》가 워낙 실망스러웠기에, 오히려 이번 작품이 기대되어 알라딘에 사전 예약을 해 두었다. 문단의 혹평에 절치부심했을지, 아니면 평시와 같이 의연히 그저 책상에 앉아 이야기를 써내려 갔을지. 

  1949년생, 올해 한국 나이로 74세인 하루키 선생이 원고지 1,200매 분량의 장편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그 체력이 경이로울 뿐이다. 포르투갈의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가 《눈 먼 자들의 도시》를 발표한 나이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과연 《눈 먼 자들의 도시》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기는 명작일지, 졸작일지는 천천히 읽어보며 나름대로 평가해 보겠다. 

  표지에 대한 첫인상. '그 거리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있다고 해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오래 봉인해 온 "이야기"의 문이, 지금 열린다', '깊고 조용히 영혼을 흔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비밀 장소]'에', '계절은 여름이었다. 강의 수면을 바람이 조용히 지나간다. 그녀의 얇은 손가락은, 나의 손가락에 무엇인가를 살짝 말을 건다. 무엇인가 중요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을.'이라고 써 있는 점으로 봐서는, 역시 《해변의 카프카》, 《1Q84》, 《기사단장 죽이기》 등의 작품들과 같이 환상의 세계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 소설에는 원작이 있다. 하루키 선생은 운영하던 재즈바의 문을 닫고, 전업 작가로서 《양을 둘러싼 모험》을 발표한 이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동명의 중편소설을 발표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하루키 선생의 팬들 사이에서는 '봉인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해 이야기를 완결 짓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하루키 선생에게 남아 있었을 테고, 4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장편소설로 완성된 것이다. 다음은 현지 언론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때는 소설 쓰는 법을 몰랐다. 글 쓰는 훈련이 안 돼 있어서 오로지 감각으로 썼다."

  2020년에 "미완성 작품을 슬슬 다시 써도 되지 않을까"라고 결심하여, 3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장편소설로 완성한 것이다. 
  
  어느 날, 소년은 갑자기 사라진 소녀의 자취를 좇아 어느 도시로 향한다. 그곳은 원래의 도시와 단절된 세계. 

  "왜 그런 걸 너는 알고 싶어 하지?" 문지기는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이 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봐야, 무슨 도움이 되지?”
  순수한 호기심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설명했다. 지식으로서 얻고 싶을 뿐이다. 뭔가에 도움이 될지 어떨지가 아니라……. 그러나 문지기는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듯 했다. 그것은 그의 이해 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그곳은 순수한 호기심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러한 곳을 소년은 소녀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간 것이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매일 도서관에서 장서를 정리하는 소녀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일.

  아침이나 저녁,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시간에는, 동네 주변을 정처 없이 산책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강변길이,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였다.
  강을 따라 산책용 도로가 이어져 있어, 인적이 거의 없었지만, 가끔 조깅을 하는 사람이나,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갔다. 길을 몇 킬로미터 하류를 향해 나아가자, 길의 포장은 갑자기 뚝 끊어져, 길은 강을 벗어나 넓은 풀숲 속으로 들어갔다.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나아가다 보면, 잠시 후-아마 10분 정도 걸었을 무렵에-그 가는 헤쳐 지나가는 길도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나는 막다른 초원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푸른 잡초는 길이가 높고, 주변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귓속에 침묵이 울리고 있다. 붉은 잠자리 무리가 내 주위를 소리 없이 날고 있을 뿐이다.
  올려다보니, 하늘은 새파랗게 맑아 있다. 가을다운 희고 단단한 구름이, 이야기에 삽입된 몇 가지 단편적인 에피소드처럼 그곳에 위치를 정하고 있었다. 가슴에 숨을 들이마시니, 씩씩한 풀 냄새가 났다. 그곳은 바로 풀의 왕국이었고, 나는 그 풀의 의미를 풀지 않는 거침 없는 침입자였다.
  그곳에 혼자 서 있으면, 나는 항상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맛본 기억이 있는, 깊은 슬픔이었다. 나는 그 슬픔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또 시간과 함께 사라지지도 않는 종류의 깊은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슬며시 남겨가는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면 좋은 것일까?
  나는 고개를 들어, 강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하고, 다시 한번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구름은 하늘의 한 장소에 가만히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따뜻한 눈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슬픔은 나에게, 눈물조차 부여해 주지 않았다.
  
  결국 소년은 소녀와 재회하지만 소녀는 원래의 소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곳은 원래의 세계와 단절된 곳이기에. 소년은 그곳에서 원래 세계에서의 의미를 복원하고 되찾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소녀가 있을 뿐. 작가 하루키는 이것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분단 되어 있는 남한과 북한,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등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전쟁에 대한 경고이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분쟁과 전쟁이 일어나는 세계에서 원래 세계에서의 의미를 찾기 힘들고, 우리는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반전 메시지가 아닐까. 
  두 개의 세계가 등장하는 세계관과 아름다운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결국 작가 하루키가 삼 년에 걸쳐 복원한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데, 그가 전하고자 한 반전 메시지는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의 단절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성장한 소년이, 벽 안의 소녀가 매일 도서관의 장서를 정리하듯이. 의미를 찾아 살아가야 한다. 

  나는 하루키 선생 소설 속 주인공을 사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년도 사랑한다. 나는 아픔을 모르는 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픔을 모르면, 인생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고,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아픔이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쓰쿠루는 친구들에게,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은 아내에게 버림 받는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주인공은 소녀가 떠난 상처를 지니고 있다. 당사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겠지만, 오래도록 아픔을 안고 사는 그들을 우리는 안쓰러이 여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루키 선생은 이러한 인물을 매력적이게 잘 창조한다. 그들에게 연민은 느끼지만 약자에게 느끼는 혐오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량이 아닐까.
 
  하루키 선생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 이 소설에도 위스키가 등장한다. 어른이 된 소년은 시골마을의 도서관에서 일을 하면서 매일 보모어 12년을 마신다. 무라키미 하루키 장편은 읽기 전에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다 읽고 나올 때도 오래 걸린다. 위스키로 따지면 피니시가 엄청 길고 강력하다. 이 소설을 읽은 우리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에 취해 그 메시지를 오래도록 탐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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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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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서구 중세를 지탱해오던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근대적 자아의 부상을 단정하는 니체의 유명한 문장이다. 이성과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근대적 관점에 따르자면 현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분명히 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신에게서 존재와 행위의 의미를 찾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실존적 선택에 직면하였을 때 선택의 참다운 동기를 찾기 어려우며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져버릴 위험성을 껴안게 되었다는 저자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이것은 21세기의 사회가 병원, 수용소, 공장 등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를 지나 개인 능력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성과를 향한 강한 압박이 정신적·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노동과 함께 끊임없는 노력만을 추구하여 개인에게 우울증을 초래하는 성과사회로 이행하였다는 한병철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한다. 규율()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유롭지만 한편으로 너무 많이 펼쳐진 길 앞에서 피로감과 무기력을 느낀다. 또한 일찍이 카뮈는 신을 속인 대가로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의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야 하는 시지포스의 상황에 빗대 인간 세상의 부조리를 표현한 바 있다. 성과사회이든 부조리이든 현대사회에서 개인에게 지우는 짐이 너무도 무겁다는 점에서 한병철과 카뮈, 드레이퍼스 및 켈리(이하 저자)의 지적은 일치한다.

   신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허용된 결과 허무주의에 빠지는 현대인의 역설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월러스는 하루 중 한 시간은 글쓰기에 할애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권태와 불안, 좌절이 지배하는 시대의 암울함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지성인이지만 현실에 벽을 세우고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여 싸우는 초월적 존재가 되고자 하였고, 글쓰기라는 과제와 열렬히 투쟁하며 인내하였다. 저자는 월러스의 대응방식-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실천에 옮긴 신의 현신(現身) 그 자체-보다 작가란 자신의 천재적 영감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길버트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월러스의 니체식 접근법과,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에 의존하는 길버트의 사고방식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저자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호메로스의 세계관을 끌어온다. 호메로스가 살던 고대 그리스는 다신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신들이 주는 빛에 응답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회였다. 호메로스적 세계가 아이스킬로스부터 예수,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데카르트, 칸트를 거쳐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로 이어진다는 일련의 분석은 탁월하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호메로스 시대의 다신교적 믿음에서 드러나는 삶의 태도가 허무주의에 휩싸이기 쉬운 현대사회의 병폐를 극복할 하나의 방안이라고 착안하여 삶의 순간마다 마주치는 일상적 의미들을 성스럽게 가다듬고 균형을 갖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이 던지는 순간의 빛남, 성스러운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커피 마시기를 성스러운 의식으로 행할 줄 알며, 이것이 허무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길고 소중하기에 일상의 순간마다 가치를 찾고 감사함을 느끼는 태도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상황에 따라 적용 가능 여부 혹은 효용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의 극복 방식은 현대의 허무주의가 일상의 무기력한 반복과 권태로 인하는 경우에만 적용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허무주의에 대해 정의해 보자. 사전에서 허무주의는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인식되지도 아니하며 또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태도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는 책의 맥락상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이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여기는 태도라고 정리하면 정확할 것이다. 허무주의는 일상의 권태나 무기력에 의해서도 일어나지만 자신의 노력에서 벗어나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결과를 불가항력적으로 맞이하고 절망하는 경우 쉽게, 더 강렬하게 일어난다. 저자의 지적처럼 현대인은 자유의지의 가치와 위력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의지와 노력이라는 개인이 의도할 수 있는 제어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까? 인생은 예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도에서 벗어난 우연한 결과는 삶의 순간순간에 지속적으로 일어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개인이 취할 앞으로의 생활방식과 개인의 행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저자는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누군가가 어렵게 합격한 회사 자리를 사장의 친지에게 빼앗겼다고 해보자.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적시에 성스러움을 얻기 위해 메타 포이에시스 기술을 갖춰야 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오히려 개인의 자유의지를 짓뭉개는 세계의 부당함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는 것이 당사자에게 위안과 일시적인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수년 간 임용고사 혹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지쳐 있는 지인들을 떠올리며 과연 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줄 수 있을지 고민을 하였다. , 최저 생계비로 하루를 나며 캔 참치를 사 먹고 남는 돈으로 신문까지 사보며 황제가 된 기분을 느꼈다는 모 의원을 떠올린 것은 내가 지나치게 삐딱하기 때문일까. 영화 기생충에서 폭우가 내린 다음 날 파티를 열어 미세먼지 없는 청정한 하늘을 만끽하는 동익연교는 저자가 설파하는 메타 포이에시스를 그대로 실현한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폭우 속 반지하에서 역류하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만 피우는 기정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 빛남을 찾으라는 저자의 말보다 독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니체의, 에이헤브 선장의 강한 의지일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말하듯 모든 것들이 빛나는 것은 아니고 더없이 빛나는 것들은 존재한다. 일상에서 그러한 태도가 필요한 때가 있다. 하지만 더 어울리고 적용가능한 시기가, 특정 계층이 있다는 말이다.

   철학이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고 삶을 올바르게 살아갈 관점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일상의 빛남을 찾으라는 저자의 논의가 지니는 의의는 명확하다. 우리는 철학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숙지해야 하며,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끝내서는 안 된다. 결국 저자의 논의는 명확한 신념 체계가 정립되지 않아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의 현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였으나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해준 것은 아니며, 다양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주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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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 2020-03-2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독서를 하며 치열하게 사유한 흔적이 보이네요... 정확한 비판에 공감과 감탄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