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서구 중세를 지탱해오던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근대적 자아의 부상을 단정하는 니체의 유명한 문장이다. 이성과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근대적 관점에 따르자면 현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분명히 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신에게서 존재와 행위의 의미를 찾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실존적 선택에 직면하였을 때 선택의 참다운 동기를 찾기 어려우며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져버릴 위험성을 껴안게 되었다는 저자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이것은 21세기의 사회가 병원, 수용소, 공장 등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를 지나 개인 능력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성과를 향한 강한 압박이 정신적·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노동과 함께 끊임없는 노력만을 추구하여 개인에게 우울증을 초래하는 성과사회로 이행하였다는 한병철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한다. 규율()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유롭지만 한편으로 너무 많이 펼쳐진 길 앞에서 피로감과 무기력을 느낀다. 또한 일찍이 카뮈는 신을 속인 대가로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의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야 하는 시지포스의 상황에 빗대 인간 세상의 부조리를 표현한 바 있다. 성과사회이든 부조리이든 현대사회에서 개인에게 지우는 짐이 너무도 무겁다는 점에서 한병철과 카뮈, 드레이퍼스 및 켈리(이하 저자)의 지적은 일치한다.

   신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허용된 결과 허무주의에 빠지는 현대인의 역설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월러스는 하루 중 한 시간은 글쓰기에 할애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권태와 불안, 좌절이 지배하는 시대의 암울함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지성인이지만 현실에 벽을 세우고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여 싸우는 초월적 존재가 되고자 하였고, 글쓰기라는 과제와 열렬히 투쟁하며 인내하였다. 저자는 월러스의 대응방식-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실천에 옮긴 신의 현신(現身) 그 자체-보다 작가란 자신의 천재적 영감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길버트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월러스의 니체식 접근법과,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에 의존하는 길버트의 사고방식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저자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호메로스의 세계관을 끌어온다. 호메로스가 살던 고대 그리스는 다신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신들이 주는 빛에 응답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회였다. 호메로스적 세계가 아이스킬로스부터 예수,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데카르트, 칸트를 거쳐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로 이어진다는 일련의 분석은 탁월하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호메로스 시대의 다신교적 믿음에서 드러나는 삶의 태도가 허무주의에 휩싸이기 쉬운 현대사회의 병폐를 극복할 하나의 방안이라고 착안하여 삶의 순간마다 마주치는 일상적 의미들을 성스럽게 가다듬고 균형을 갖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이 던지는 순간의 빛남, 성스러운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커피 마시기를 성스러운 의식으로 행할 줄 알며, 이것이 허무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길고 소중하기에 일상의 순간마다 가치를 찾고 감사함을 느끼는 태도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상황에 따라 적용 가능 여부 혹은 효용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의 극복 방식은 현대의 허무주의가 일상의 무기력한 반복과 권태로 인하는 경우에만 적용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허무주의에 대해 정의해 보자. 사전에서 허무주의는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인식되지도 아니하며 또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태도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는 책의 맥락상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이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여기는 태도라고 정리하면 정확할 것이다. 허무주의는 일상의 권태나 무기력에 의해서도 일어나지만 자신의 노력에서 벗어나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결과를 불가항력적으로 맞이하고 절망하는 경우 쉽게, 더 강렬하게 일어난다. 저자의 지적처럼 현대인은 자유의지의 가치와 위력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의지와 노력이라는 개인이 의도할 수 있는 제어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까? 인생은 예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도에서 벗어난 우연한 결과는 삶의 순간순간에 지속적으로 일어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개인이 취할 앞으로의 생활방식과 개인의 행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저자는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누군가가 어렵게 합격한 회사 자리를 사장의 친지에게 빼앗겼다고 해보자.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적시에 성스러움을 얻기 위해 메타 포이에시스 기술을 갖춰야 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오히려 개인의 자유의지를 짓뭉개는 세계의 부당함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는 것이 당사자에게 위안과 일시적인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수년 간 임용고사 혹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지쳐 있는 지인들을 떠올리며 과연 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줄 수 있을지 고민을 하였다. , 최저 생계비로 하루를 나며 캔 참치를 사 먹고 남는 돈으로 신문까지 사보며 황제가 된 기분을 느꼈다는 모 의원을 떠올린 것은 내가 지나치게 삐딱하기 때문일까. 영화 기생충에서 폭우가 내린 다음 날 파티를 열어 미세먼지 없는 청정한 하늘을 만끽하는 동익연교는 저자가 설파하는 메타 포이에시스를 그대로 실현한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폭우 속 반지하에서 역류하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만 피우는 기정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 빛남을 찾으라는 저자의 말보다 독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니체의, 에이헤브 선장의 강한 의지일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말하듯 모든 것들이 빛나는 것은 아니고 더없이 빛나는 것들은 존재한다. 일상에서 그러한 태도가 필요한 때가 있다. 하지만 더 어울리고 적용가능한 시기가, 특정 계층이 있다는 말이다.

   철학이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고 삶을 올바르게 살아갈 관점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일상의 빛남을 찾으라는 저자의 논의가 지니는 의의는 명확하다. 우리는 철학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숙지해야 하며,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끝내서는 안 된다. 결국 저자의 논의는 명확한 신념 체계가 정립되지 않아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의 현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였으나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해준 것은 아니며, 다양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주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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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 2020-03-2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독서를 하며 치열하게 사유한 흔적이 보이네요... 정확한 비판에 공감과 감탄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