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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보자기
도광환 지음 / 자연경실 / 2023년 5월
평점 :
미술에 워낙 문외한이라 다양한 미술 관련 책을 접하려 노력했고 많은 책들을 만났지만 이 책은 아주 독특했다. 미술사조를 논하지도, 화풍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들여다본다. 미술이 늘 어려웠던 나도 이 책을 읽고 나니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함께 그림을 보며 저자와 이야기를 나눈 느낌이 든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작가의 작품도, 어렵게만 느껴졌던 추상미술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참 묘하다. 미술책을 읽은 느낌이 아닌, 아주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느낌이다. 책을 덮고 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책은 먼저 '나'를 고찰해 볼 수 있는 다양한 그림부터 함께 살펴본다. 죽음, 성찰, 고독, 환희, 고통, 불안 등 인생에서 겪는 다양한 감정과 희로애락의 삶의 모습들이 담긴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 나와 연결된 '가족'이 담긴 그림을 보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겪는 다양한 감정과 모습들을 살펴보고, 나를 둘러싼 종교, 역사, 도시가 담긴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책 속에 담긴 그림은 나의 삶, 내 가족의 삶,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단편들이 그대로 녹아있고, 그래서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다들 그리 산다고, 누구나 똑같다는 위로를 받게 된다.
인생은 짧다. 권력과 예술가는 더 짧다. 예술은 길다. 그 이야기는 더 길다. P208
모든 그림 속엔 이야기가 있었다. 화가들은 모든 순간의 인생을 그렸다. 위대한 역사도, 비참한 전쟁도, 그리고 파리의 뒤안길도. 에밀 졸라가 펜으로 사회를 보고했듯이 화가들은 그림으로 사회를 그대로 표현했다. 내가 그림이 어려웠던 건 그림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답을 찾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내가 내 수준에서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그림을 해석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니 바람 소리도 들리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림은 그리 보면 되는 거였다.
인생은 '나'를 찾아 떠나는 긴 여행이다. 여행의 짐은 가볍지 않고, 길은 낯설며, 돌아올 날은 정해져 있지 않다. 여행의 방법과 일정은 수없이 많겠지만, 틀림없는 사실 하나가 있다. 여행은 반드시 끝난다는 점이다. 그건 죽음이다. P357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인문학적 생각들을 전달한다. 종합선물세트처럼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생각과 인용문들은 독자를 깊고 풍부한 인문학으로 이끈다. 그리고 처음 접해본 사철 제본은 고급 제본답게 책 넘김도 좋고 그림을 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아 아주 만족스러웠다. 저자가 얼마나 이 책에 애정을 쏟았는지 알고도 남음이다.
보. 자. 기는 보는 일, 자신을, 기억하는 일의 첫 글자를 따와서 지은 제목이다. 나를 찾는 여행인 인문학의 그 첫 발걸음을 그림 이야기를 들으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누군가의 삶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 이 책은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