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창비시선 256
박남준 지음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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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은 갔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하략) 

- 출처 : 박남준「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2010)


시를 찾아, 시에 갇혀, 결국 여기까지 왔다던 시인은“2010년 악양에 뼈를 묻기로 했다. 여섯 번째 시집이다. 뭔가 좀 달라지고 싶었다. 그간 내 시의 주조를 이루던 정서는 슬픔이었다. 분노를 버리지 않았으나 밝고 즐거운 시를 쓰고 싶었는데 글쎄……."라고 고백한다. 아린 슬픔을 전하는 시집「적막」과는 다른 애잔한 발랄함이「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서 느껴진다. 백사로 날은 흐리지만 꽃비의 봄날은 올 것이다. 노랑, 분홍 봄날 꽃은 피고 연초록 나뭇잎에 깃든 햇살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이할까? 이 화사한 봄에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앉는’ 시집「적막」과 눈이 맞아버렸다. 노모를 뵈러가는 기차시간을 읽기 위해 급하게 집어든 책이다.

 

 ‘어째서 당최 기별이 없다냐/에미는 이렇게 보고 싶은데/......../전화기 속에서 징징거리는 늙은 여자가 걸어나온다/.’

 

먼저 전화드려야지 마음 먹지만 늘 엄마가 선수를 친다. 마흔 넘은 딸의 끼니를 걱정하는 엄마, 그 엄마들의 걱정과 그리움이 뭉근히 배어있다. 기차로 오가는 시간, 시를 보며 자주 먼 산을 바라본다.

 

‘길을 따라 떠나간 것들이 그 길을 따라/꼭 한번은 돌아오리라 믿고 있기 때문’인지 '풍란으로 인해 얻는 것이 있다/한 평 땅이 없으면 어떠랴 길이 아닌들/나 이미 오래 흘러왔으므로‘.

 

그렇게 앞으로도 조근조근 걸어갈 것을 다짐하는 것인가. 쓰러진 것들, 새들, 나무들을 불러내어 시를 읊조리니 나직히 쓸쓸함이 감돈다.

 

’무너지지도 않은 다리를 본 적이 있다/오랜 가뭄 끝에 바닥을 드러낸 화순 근처의 저수지/........./죽은  잔재들 저만큼에 실개천을 가로지르는/그 다리, 저문 하루의 일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며/발목을 적시지 않고 건넜을 앉은뱅이 다리 하나/아직 저 눈곱만한 다리는/길을 되짚어 와야 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에 잠긴 앉은뱅이 다리가 외롭게 느껴지더니 불현듯 오랜 세월을 견디는 힘을 깨닫는다. 쓸쓸하고 쓸쓸하더니 나무가 다리가 새들과 묵묵히 세월을 견디는 힘이 느껴진다.

이렇게 봄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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