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남자의 삶 그리고 죽음. 체험한 것들의 기록이 훌륭한 문학이 되는 작가 아니 에르노는 ‘소녀 시절에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그 거리(距離)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고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불러낸다. 필립 로스의「에브리맨」이 일인칭 시점으로 회한어린 한 남자의 삶과 죽음을 보여준다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는 딸이 보고 들은 아버지의 그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리’가 아니라「남자의 자리」이다.

그 남자는 ‘20세기가 열리기 몇 달 전, 바다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나 동네모임에서 음식바구니를 따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미련한 놈이라는 욕을 먹고 열두살 때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일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건 꿈도 못 꿨다. 그땐 다들 그랬어.’

농가에서, 공장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게를 열지만 ‘지닌 걸 다 잃고서 다시 노동자 신세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일도 결혼도 하지 않고 나이가 차서도 공부만 하는 딸을 이해할 수 없지만 딸의 부르조아 친구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는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이렇게 말한다.

 

‘난 널 한 번도 창피하게 만든 적이 없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품격을 지키고 사위에게조차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는 걸 자존심으로 여기는 그’는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손수건으로 덮어 놓는’다. 그리고, ‘젊었을 때는 미남’이었던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는 장례식 날 하루만 가게 문을 닫았다. 잘못하면 손님들이 떨어져 나갈 터인데, 그건 어머니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129쪽의 작고 짧은 책을 보며 상념에 젖은 것은 그의 삶이 내가 알고 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한국의 한 남자’와 닮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센 강 하구지역의 남자, 다른 한 남자는 한국의 변방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저버리는 일 없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두 남자의 삶과 죽음의 줄거리는 일치하는 바가 없다. 한 남자는 프랑스의 역사와 사회 변화 속에서 그만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 고군분투하였고, 다른 남자는 한국의 역사와 사회 변화 속에서 진퇴를 거듭하다 ‘영감이 할망구 먹을 것도 안 남기고 갔다’고 푸념하는 아내와 제 몫의 삶을 사는 다섯 명의 자식들만 남기고 스러져갔다.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프랑스와 한국의 두 남자는 ‘젊었을 때는 미남’이었다는 것과 펀치를 날리는 세상과 당당하게 맞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우리는 어머니, 할머니의 삶에서 ‘여자’를 느낄 때 공감을 동반한 슬픔이 일렁인다. 남자로 태어나 아버지라 불리고 사회적 성공을 향해 삶을 불태운 ‘남자’의 삶과 죽음은 진흙탕 싸움같아 비애를 느낀다. 어렸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벌어먹고 사는 20여 년에 참으로 궁금하다. 한국 변방 출신 ‘그 남자’는 삶의 무게에 휘청이면서도 어떻게 포기하지 않았을까?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손수건으로 덮어 놓는’ 프랑스 남자처럼 한국의 그 남자 또한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울분을 토할 시간도 없이 숨가쁘게 살았을 것이다. 또는 고독하게 그 시간을 견뎠을 것이다. 「남자의 자리」는 자기 몫의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인간의 자리」다. 삶의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온 그 남자들의 삶과 죽음에 비애를 느끼며, 목숨 걸고 삶의 매 순간을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가는 우리. 그 남자들이 자신의 자리에 엄숙히 충실했듯, 우리는 이 삶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그들)의 삶과 죽음, 한번쯤 돌아봐주고 읽어주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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