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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 2012년 제4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평점 :
가끔은 떨어줘야 하고, 가끔 떠는 것은 나쁘지 않은 궁상은 잘 떨면 재미있고,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 좋을 수도 있지만 잘못 떨면 스스로도 면목 없게 될 위험이 있고, 곧잘 그 정도가 지나치기 쉽고,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몸에도 좋지 않을 수 있어 궁상을 떨 때에는 조심해야 했다. ......
(중략)......궁상은 가혹하게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 세계에 맞서기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며 백기를 흔들면서 속으로 웃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 본문 65p.
작가는 ‘이 소설은....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샌프란시스코 체류기’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말과 생각의 표류기로 느껴지는 소설을 펼치면 독자는 ‘나’와 함께 ‘데킬라를 마시며 선인장을 저격하며 보낸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어이없는 짓’에 동참하고 ‘미국의 호보’에 대한 정보를 쌓고 ‘내가 매사에 의욕이 없어 태평양을 떠돌지 못하게 된 과일들’의 반전에 멍 때리다 ‘뭔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떤 작위의 세계’에 잡혀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생각 같은 것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경지에 다다라 ‘텅 빈 눈으로 뜬구름‘을 보게 된다.
통상 소설이 관계와 사건 중심이라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나‘가 머무는 또는 머물렀던 시공간에서 본 것들을 생각하고 연상하고 유추하고 상상하는 것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이 소설에 멀미가 날 수도 있겠다.
등장인물이라 할만한 관계가 없음에도 불쑥불쑥 작가 자신이 튀어나와 말을 건네는 바람에 놀라기도 하고 문득 체류기와 이 소설은 무엇이 다른 걸까 골똘히 생각하다 소소하고 사소한 것에 골몰하며 이론을 만드는 작중 화자를 닮아가나 싶어 웃을 수도 있다. 사건도 없고 관계라 할 만한 것도 없는 이 소설은 ’재미있다‘. 끝없는 생각에 멀미나는 재미(그러니 이 재미는 롤러코스터급이다), 길거리 스쳐 지나는 인물을 상상하는 재미, 궁상과 청승, 방정과 치를 떠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재미,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라는 이 소설에 부합‘하듯 지극히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에 대한 글에 매료되어 웃다 내가 왜 이런 것을 보고 웃지 문득 정신을 차리는 재미. 무궁무진한 재미를 선사하는 소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소설에서 중요한 관계와 사건은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일어난다. 무슨 책을 읽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도서관이나 서점을 방황하던 예비 독자가 문득 이 책을 집어들 때 - 3대 문학상을 휩쓴 수상작품이건, 제목의 난해함이건, 어둠에 묻힌 표지 때문이건 - 사건은 일어나고 첫 장을 넘기며 작가가 펼쳐놓은 ’생각과 말의 어지러운 장난‘에 휩쓸러 관계가 만들어진다.
사회가 욕망하는 것들과 거리가 먼 것들에 지극히 심사숙고하는 이 책의 독자라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무언가를 빼앗거나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가 강요하는 욕망의 목록을 잠시 외면하고 소소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심사숙고하는 세상을 만나고 나면, 올드독의 영화노트에 씌여진 ’문득 쓸모없고 아름다운 것들로 삶을 가득 채워가며 살다가 헛되이 죽어야겠다고 결심해보았다‘라는 비움에 문장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가 말한다.
’타인의 상상력이 만든 소설보다도 자신의 공상이 훨씬 흥미롭다. 꿈이 떠다니는, 고독한 즐거움이다‘
해보지 않아 곤란하다면 지친 욕망을 잠재우는 다른 이의 고독한 즐거움 속으로 떠나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