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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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Girl, Woman, Other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좀 복잡한 기분이다.

한 편의 긴 장편 영화를 본 것 같다.

이 영화는 12 편의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각각의

단편 영화들은 서로 무심한듯 그러나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낯설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잘 넘어가질 않았다.

600 페이지가 넘는 긴 장편이다.

문장 간의 마침표조차 없다.

꾸역 꾸역 묵묵히 읽다가...


몇 장을 더 넘기면서 어느 순간 울컥한다.

어디에서 공감점을 찾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허세 부리는 엠마의 행동과 어색한 차림새?

은징가를 만나 고생을 자처하는 멋쟁이 도미니크의 비애?


그 뒤로 이 책을 더 자세히 파봐야겠다는 생각에

몇 년 만에 돋보기를 찾아 꿰찼다.

형광펜과 샤프가 등장했다.

벽돌 수준의 이 두꺼운 책이

온통 연필과 오렌지색 형광펜에 시달리면서

급기야 얼룩덜룩 해져 버렸다.

괴롭힌다. 책을.

그러면서 희열을 느꼈던 신기한 책.


이 책은 발칙하고, 낯설지만,

잔잔하고도 강렬하며,

서글프고 안타깝기도 하고

통쾌하고 빛이 난다.


당신의 삶은 어떤 빛깔인가요?



나와, 모든, 여자들의 이야기


오늘의 나는 오렌지를 택한다.


부모는 아들들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맞설 수 있도록

든든한 토대를 만들어주어야 했다

셜리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딸은 그보다 수월하게 지낼 수 있었다 p. 358





열두 명의 등장인물 중 나는 비슷한 부류의 셜리에게 눈길이 간다.

그녀의 배경, 성격, 태도, 행동... 어머니 윈섬에게서 이어지는 전통까지도...

윈섬 --> 셜리 --> 레이철 --> 매디슨

너무도 완벽하고 자상해 보이는 어머니, 성공한 듯 보이는 흑인 중년 여성의 삶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가정적인 셜리의 엄마, 그녀 윈섬이,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은 

그야말로

희대의 반전이다.


윈섬 역시 처음에는 딸이었고 다음에는 아내이자 어머니였고, 지금은 할머니면서 증조할머니다. p.360


우리 모두는 그러하다.


지금의 모습, 지금의 역할, 지금의 환경에 맞추어 가끔은 또는 자주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이 어색하게 역할 놀이를 하고 있지만

그런 것이 미처 규정지어지기 전에는 어린 시절이 있었고, 지금과

다른 어른의 모습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와닿지 않던 등장인물 들의 행동과 생활 방식이,

그리고 그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들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빨아들이고 설득시키면서 서서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


이곳에 나온 열두 명의 여인들은 나이고, 너이며, 우리 모두이다.


이 스토리에는 방대한 서사시적 장면이나 웅장하고 스펙터클한

화려함은 없다.

그냥 우리의 이야기고 삶이고 생활이고 일상이다.

다소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색안경을 쓰고 읽기 시작한

나로서는 편협한 내 시각에 스스로 민망하고 미안해지는 순간들이었다.


모든 삶은 아름답다.

이유 불문하고 (아니, 분명 그리된 이유들이 다 있다) 그들의,

우리들의 삶은 찬란하고, 소중하며, 애틋하고 그리고...소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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