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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유로피안적인 표지와 제목, 프롤로그에 들어간 메리 올리버의 시까지
이 모든 것이 아득하고 이국적인, 어딘가를 한없이 그리워하는 나의 정체불명의 감성을 찔러대어 아니 사볼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뒷통수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 나의 혹시나 하는 기대를 역시나로 바꾼 것 뿐일 지도 모른다. 그의 단편 몇개를 읽고 다시는 읽을 일이 없을 것 같다고 결별을 고했던 적이 있었다. 소와 닭처럼 애초에 맞지 않는 주파수라고 생각했었다.(하긴 그렇게 홀로 결별을 고한 작가가 한 둘이어야지.)
물론 이것은 취향 문제다. 객관적으로 나쁜 책도 나에게 울리면 귀한 것이니까. 나는 단지 작가의 말처럼 내가 내 자신 바깥에 존재하는 바로 그 상태로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광주항쟁, 홀로코스트, 마르크스 주의, 80-90년대 운동권, 히로뽕 매매 등 이 수많은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단행본 하나에 다 들어가 있다보니 주로 이야기 나열식이다. (히로뽕 이야기에서는 히로뽕 제조과정까지 밝히고 있는데, 작가가 정말 박학다식하다, 자신의 지적허영을 채워주었다는 독자들이 있었다. 내 눈에는 조사한 것 아까워서 넣었거나 블로그처럼 정보 공유 차원이라 여겨지던데;;) 여튼 화자가 이 많은 이야기들을 죄다 평을 곁들여 늘어놓는다. 질리지 않을 수가 없다.
주인공 '나'는 정민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대야 하는 천일야화적인 연애를 하지만 독자들 역시 그것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정말 곤란하다. 오에 선생의 '사육'과 괜히 비교하고 싶어지네. 이 작품 마지막에 나는 서기의 죽음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아, 이것이 소년이 겪은 전쟁의 상처다. 여기는 그런 멈춰진 순간, 보여주기가 없다. 이랬대, 저랬대 급해서 체할 것만 같다. 나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 책을 읽는데 작가는 그것을 모른다.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다. 다 한 사람같다. 역사에 상처 받은 그들은 이 세계가 진실되지 못함을 느끼고 철학자로 변신한다. 다 그러하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살아남은 것이라는 허무와 우연의 세계에서 벗어나 백주대낮에 시민을 살해하는 폭압적인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존재, 서로 연대하였으므로 쉽게 죽지 않는 존재로 바뀌어나간 것처럼
상처받고 그래서 철학적이기 때문에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감동하고 '넌 남이 아냐, 별이 서로를 끌어당겨 어느 시점에서는 조우하듯이 우리의 만남은 예견된 것이야' 라고 한다. 어찌 이리도 이심전심이 쉬운지......이 시점에서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운명 이었기에
바랄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이 소설에서 할 말은 여기 다 담겨있다고 본다. 나는 그래서 음악과 시를 소설보다 더 우위에 둔다. 그러니까 어두운 방안에서 혼자 남겨져 있다고 나는 이 세계의 파편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주의 중심인 내가 되자. 여기는 누군가의 논리대로 만들어진 세계, 진짜 세계는 분명히 따로 있으니까 그것을 그리워하며 살자. 우리는 본디 하나의 물질이야, 이거 죄다 마르크스의 이론이다(세계에는 운동하는 물질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또 운동하는 물질은 공간과 시간 밖에서는 운동할 수가 없다. 세계는 하나이며 물질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좀 당황스러운 것은 이 메세지를 한 페이지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연설문의 어조로. 마치 고전소설의 작가 개입처럼.
가장 큰 문제는 이 소설이 사랑이야기라는 것이다. 부제를 붙이자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가 어울리겠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위의 세계관에 따른 행동방침이 나오는데 바로 '마음껏 사랑하라'다. 끝부분에 가서 독일인 헬무트는 숨김없이 행동방침을 내린다. "가능한 애인과 많이 만나고 키스하고 섹스하라". 게다가 소설의 마지막 챕터는 '커다랗고 넓은 하얀 침대로'이기까지 하다.
이야기의 실마리라고 하는 '누드로 다리를 벌린 채 앉아 있는 여자의 사진' 역시 그러한 주제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인다. 이길용의 아버지도 나의 할아버지도 그러했고 이길용도 나도 동의한다. 행복은 거기에 있다고. 사랑을 이면에 두고 있다고 해석해야겠지만 분명 구체적인 은유는 섹스다. 작가가 사랑의 방식으로 섹스를 가장 중시한다는 점이 그러고보니 이곳 저곳에서 발견된다.
근데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 왜 문제라는 거냐. 촌스러워서 봐주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 통기타적인 낭만성! 투쟁 일로 바쁜 정민에게 내가 벗나무 아래에서 투정부리는 장면이라든지, 강시우가 된 이길용이 애인인 레이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 죽어."라는 멘트를 날리는 것. 정말 옳지 않다고 본다. 80년대 통속 영화 보는 것만 같다. 그리고 긴 머리카락의 샴푸 냄새에 성적인 충동을 느낀다든지, 손가락이 가늘고 길고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입술은 작고 도톰한 그녀라든지. 남자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종종 등장하는 뮤즈화된 여성 캐릭터의 '전형적인' 묘사 나는 정말 말리고 싶다.
뭐라고 길게 길게 썼지만 아무도 여기에 영향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걍 마음에 안드는 소설이 너무 잘 팔리고 리뷰도 칭찬 일색이라 시기심에 불탄 것으로 해두지. 앞서 얘기했다시피 객관적으로 좋아도 나한테 울리지 않으면 종이조각에 불과한 것이니.
이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란다.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