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타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15센티미터 정도 문을 열고 미도 군이 얼굴을 내민다. 내민 순간 우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눈으로 천천히 웃는다. 아토히키마메 같은 웃는 얼굴이다. 이제, 모든게 어찌 되든 상관없어졌다. 콧속이 뜨거웠다. 무안당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가로젓자 한쪽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 이를 악물고 바닥을 울렸다. 미도 군 쪽을 향해서, "목이 마르니 차가운 것 좀 줘." 하고 거만하게 말했다. "그냥 맹물이어도 좋아." 미도 군은 움직이지 않는다. 여전히 웃고만 있다. 그러면서 문을 활짝 열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이유일까. 넋이 나가 멍하니 있는 걸까. 아니면.

"물, 안줄거야?"

설령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 해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미도군, 무색에 맑은 그냥 맹물을 마호코 씨에게 한 잔 주기 않을래. 보고 싶었다고, 그 말만 하러 온거야.

- '애가 타다' 중

 

지난 13년 동안 한 걸음 더 다가간 순간들이 점이 되어 이어져 있다. 서로 마음에 살짝 손을 댈 수 있었던 시간은 언제나 순간일뿐, 눈 깜짤할 사이에 기억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 때도, 그 때도, 하고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얼마나 달콤하고 따뜻하게 내 가슴은 아팠던가.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슬펴져서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 '한 걸음 더' 중

 

 

어린 남자애와의 불확실한 관계에 애가 타는 여자.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지내는 직장 동료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들을 애달파하며 웹에서 첫사랑을 찾는 여자. 자신에 대한 열정이 점점 식어가는 약혼자를 보며 공허함을 느끼는 여자.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또 그 남자와의 재회를 기대하기도 하는 여자. 고등학교 시절 '선택 당하지 않은' 비참함을 느끼고 평생을 프레임에 갇혀 사는 여자.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의 건강미를 보며 '임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마는 여자. 13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방황하는 여자. 

가스미의 '애가 타다'에는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30, 40대 싱글 여성들의 공감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정말 그려져 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오랜만에 그려진 작품을 만났다. 각각의 작품들은 죄다 연애 이야기다. 그리고 여자들의 이야기이자 성장기다. 그들은 모두 남자와의 관계에서 애를 태우고 거기에 따른 공허감에 괴로워한다. 그러고 있자니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그것은 어린 시절 의사 선생님, 할아버지, 첫사랑, 옛 친구일 때도 있다.  

성장기는 참 달콤하다. 고통과 희망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나조차 성장통을 앓는 인물이기 때문에 감정이입은 쉽다. 누구 때문이든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두려움과 외로움, 거짓으로 웃음지어야 하는 두통. 하지만 그래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걷고 있구나, 달리고 있구나 실감하는 느낌으로 또 계속 달려나갈 수 있겠다는 느낌을 갖는 것.

트럭에 태워져 황무지로 와서 혼자 떨구어지는 기분이다가도 "보고 싶다"는 어떤 이의 진심어린 한 마디에 또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우리는.

아사쿠라 가스미. 자신을 가장 작은 일본 소설가라고 소개하는 그 분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